벨사살(벨사자르, 영어: Belshazzar 또는 Balthazar, 히브리어: בֵּלְשַׁאצַּר, B.C. 550-B.C. 539)은 바벨론(신바빌로니아 왕국)의 마지막 왕이다. 느부갓네살(네부카드네자르 2세, 히브리어: נְבוּכַדְנֶאצַּר )의 손자이며, 나보니두스(Nabonidus, 재위: B.C. 556-B.C. 539)의 장자다. 19세기 중반까지만 해도 벨사살은 역사적으로 고증되지 않은 미스터리한 인물이었다. 성경 다니엘서에만 이름이 있을 뿐, 바벨론에 대한 어떤 역사서나 기록에서도 벨사살이라는 이름을 찾을 수 없었다. 이에 성경이 허구라는 주장이 있었으나, 1854년과 1879년에 고대 바벨론 유역에서 벨사살의 이름이 기록된 유물이 잇따라 발견되면서 그의 역사적 실존이 증명됐다.
시대적 배경
기원전 586년경 남 유다를 정복한 느부갓네살은 예루살렘성을 완전히 파괴하고 수많은 전리품을 약탈해 간 동시에 유다의 왕족과 귀족 등을 포로로 잡아갔다.[1] 다니엘도 이때 바벨론으로 잡혀갔다. 이 시기에 바벨론은 최고의 전성기를 누렸다. 느부갓네살은 제국의 인력을 총동원해 바벨론 도성을 재정비했고 그곳 사람들은 낙원과도 같은 도시에서의 삶을 만끽했다.[2]
그러나 느부갓네살 사후 바벨론의 국운은 급속히 기울어, 기원전 539년경 벨사살 때 바사(페르시아)의 고레스(키루스 2세)에 의해 멸망했다.
성경 속 벨사살
다니엘 5장에는 벨사살이 바벨론 멸망 전 마지막 밤에 열었던 연회에 대해 구체적으로 기록돼 있다.
벨사살은 일천 명의 귀인을 모아 놓고 잔치를 벌였다. 느부갓네살이 예루살렘 성전에서 탈취해 온 금, 은 기명으로 술을 마시며 우상의 신을 찬양했다. 그때 벨사살이 보는 앞에 사람의 손가락이 나타나 벽에 글자를 썼다. 번민에 빠진 벨사살은 술사와 점장이, 박사들을 모두 불러 벽에 쓰인 글자를 읽고 해석하라고 명했지만, 어느 누구도 하지 못했다.
이때 다니엘이 글자를 해석해 주었다. 그는 벨사살이, 하나님 앞에 교만하여 한때 폐위되었던 선왕 느부갓네살의 일을 알면서도 스스로 높아져 하나님 성전의 기명으로 술잔을 삼고 우상을 찬양하며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지 않았기에 이런 일이 벌어졌다고 설명했다.
이어 벽에 쓰인 글자를 읽고 해석했는데, 글자는 '메네 메네 데겔 우바르신(מְנֵ֖א מְנֵ֥א תְּקֵ֥ל וּפַרְסִֽין׃, Mene Mene Tekel UParsin)'이었다. 메네(Mene)는 '하나님이 이미 왕의 나라의 시대를 세어서 그것을 끝나게 하셨다', 데겔(Tekel)은 '왕이 저울에 달려서 부족함이 보였다', 베레스(Peres)는 '왕의 나라가 나뉘어서 메대와 바사 사람에게 준 바 되었다'는 뜻이라고 해석했다.[3] 다니엘의 설명을 들은 벨사살은 다니엘을 위해 조서를 내려 그를 나라의 셋째 치리자로 삼았다.
그날 밤 바벨론은 결국 바사의 고레스에 의해 함락되었으며, 벨사살은 죽임을 당했다.
벨사살의 실존 증거
19세기 중반까지만 해도 벨사살은 역사적으로 존재가 증명되지 않은 인물이었다. 성경의 다니엘서 기록 외에는 어떤 바벨론 사료에서도 벨사살을 찾아볼 수 없었다. 역사적으로 고증된 바벨론의 마지막 왕은 나보니두스다.[4] 이에 일각에서는 벨사살을 언급한 성경이 역사적 사실이 아닌 허구라고 주장했다. 그런데 고대 바벨론 유역에서 이 같은 주장을 뒤집는 유물이 발견됐다.
나보니두스 실린더
1854년 고고학자들이 고대 바벨론 우르(Ur)의 신전 폐허 속에서 나보니두스 실린더(Nabonidus Cylinder) 4점을 발견했다. 이 실린더들에는 놀라운 기록이 동일하게 새겨져 있었다. 바벨론의 마지막 왕이라고 알려진 나보니두스가 자신의 장자 벨사살의 이름을 기록해 놓은 것이다.
“ 바벨론의 왕인 나 곧 나보니두스가 당신께 죄를 짓지 않도록 해주소서, 그리고 나의 장남이며 사랑하는 아들인 벨사살 (그는 다니엘 5장에 느부갓네살의 아들이자 바벨론 왕으로 언급되어 있다. 벨사살은 성경에 기록된 그의 이름이다. 벨-사르-우수르는 그의 본명을 더 잘 표현한 것이다) 마음에 당신에 대한 경외심이 있게 하소서[5] “ — 우르에서 발견된 나보니두스 실린더 비문 일부
나보니두스 실린더는 바벨론 역사 가운데 찾아볼 수 없었던 벨사살의 이름을 확인하게 된 첫 사료다. 나보니두스가 자신의 아들 장남 벨사살을 언급한 것을 발견함으로써 벨사살이 성경에만 존재하는 허구의 인물이 아니라 실존했던 인물이라는 사실이 드러났다.
명칭 | 사진 | 소장 기관 | 발굴 연도와 장소 | 내용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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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보니두스 실린더 | 런던 대영박물관 | 1854, 우르 | 벨사살이 나보니두스의 장자로 기록 |
나보니두스 연대기
나보니두스 실린더를 발견한 지 20여 년이 지난 후 나보니두스와 벨사살의 이름이 기록된 비문이 하나 더 발견됐다. 나보니두스 연대기(Nabonidus Chronicle)다. 1879년에 대영박물관이 한 유물 상인을 통해 입수한 이 비문에는 나보니두스의 통치 기간의 기록이 담겨 있었다. 나보니두스 치하의 바벨론 멸망과 고레스 치하의 바사 제국의 시작에 대한 역사다.
이 서판에는 나보니두스가 그의 통치 말엽 약 10년 동안 바벨론에 없었다는 역사적 사실이 기록되어 있다. 재위 7년부터 16년까지 약 10년 동안 나보니두스는 테마(Tema, 성경의 데마)[6] 혹은 타이마(Tayma)라는 아라비아사막의 도시에 있었고, 그 기간 동안 장자 '벨사살(Belshar-usur, 벨사르-우수르)'이 군대와 함께 바벨론 궁을 지켰다는 것이다.[7] 나보니두스가 바벨론에서 멀리 떨어진 테마에 체류하는 동안 후계자 벨사살이 실질적으로 바벨론을 통치했음을 알 수 있다.
명칭 | 사진 | 소장 기관 | 발견 연도와 발견 장소 | 내용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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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보니두스 연대기 | 대영박물관 | 1879, 유물 상인에게서 대영박물관이 입수 | 나보니두스가 테마에 있을 때 벨사살이 바벨론을 통치
바사 제국 고레스왕이 바벨론을 정복 |
나보니두스 실린더와 나보니두스 연대기의 발견으로 성경이 그 어떤 역사서보다 더 정확한 기록임이 분명하게 드러났다. 1854년에 영국의 저명 잡지인 《애서니엄》(The Athenaeum)[8]은 우르에서 발견된 나보니두스 실린더에 벨사살 이름이 기록되어 있는 사실을 기사화하면서 실린더의 특별한 가치와 의미도 함께 보도했다.
“ 그러나 가장 중요한 사실은, 그들이 공개한 대로 나보니두스의 장남 벨사살이 자신의 아버지로부터 공동 통치자로 인정받았다는 것이다. 이 이름은 의심할 여지 없이 다니엘서에 나오는 바로 그 벨사살이다. 이것은 지금까지 해결되지 않았던 위대한 역사적 문제를 설명할 열쇠를 우리에게 제공한다. 이제 우리는 어떻게 벨사살이 그의 아버지와 공동 통치자로서 바벨론의 통치자가 되었는지 이해할 수 있다. 바벨론 도시는 메데와 페르시아의 연합군에게 공격당했고 뒤이은 습격으로 멸망했을 것이다. 당시 군대를 이끌어 도시를 구하려던 나보니두스는 패배하고 인근 도시인 보르시파(또는 비르시님루드)로 피난해야 했고, 잠시 저항하다가 항복했다. [고대 바벨론의 역사가] 베로수스의 기록에 의하면, 나보니두스는 이후 카르마니아에서 명예로운 퇴위 명령을 받았다. 실제로, 나보니두스의 아들인 벨사살의 이름을 발견함으로써, 우리는 처음으로 진정한 역사―예를 들어, 그것은 헤로도토스와 베로수스와 관련이 있지만 크세노폰의 로맨스나 크테시아스의 우화에서 찾아볼 수 없다―를 우리 종교를 이해하는 데 장벽이 되어 온, 다니엘이 영감을 받아 기록한 것[다니엘서]과 일치시킬 수 있게 되었다. “ — 《애서니엄》(The Athenæum), J. 프란시스(J. Francis), 1854년 3월호
나보니두스 실린더와 나보니두스 연대기는 벨사살의 실존 증거가 됨과 동시에 또 다른 의혹을 해결해 주었다. 다니엘 5장에서 벨사살왕은 다니엘에게 "꿈을 해석하면 나라의 셋째 치리자를 삼겠다"고 약속하고, 실제 그렇게 했다. 이 기록은 성경 학자들 사이에 오랜 의문이 되어 왔다. 벨사살이 왕이기 때문에 상식적으로 다니엘이 꿈을 해석하면 '둘째 치리자'를 삼겠다고 해야 이치에 맞기 때문이다.
[벨사살] 왕이 크게 소리하여 ... 누구든지 이 글자를 읽고 그 해석을 내게 보이면 자주옷을 입히고 금사슬로 그 목에 드리우고 그로 나라의 셋째 치리자를 삼으리라 하니라 ... 내가 네게 대하여 들은즉 너는 해석을 잘하고 의문을 파한다 하도다 그런즉 이제 네가 이 글을 읽고 그 해석을 내게 알게 하면 네게 자주옷을 입히고 금사슬을 네 목에 드리우고 너로 나라의 셋째 치리자를 삼으리라 ... 이에 벨사살이 명하여 무리로 다니엘에게 자주옷을 입히게 하며 금사슬로 그의 목에 드리우게 하고 그를 위하여 조서를 내려 나라의 셋째 치리자를 삼으니라 그날 밤에 갈대아왕 벨사살이 죽임을 당하였고 메대 사람 다리오가 나라를 얻었는데
이 의문은 나보니두스 연대기가 발견됨으로써 해소됐다. 부왕 나보니두스가 나라의 첫째 치리자이고, 벨사살이 둘째 치리자였기 때문에 다니엘에게 셋째 치리자를 약속할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이로써 성경 다니엘서의 기록이 틀림없는 역사적 사실이라는 점이 다시 한번 확실해졌다.
같이 보기
각주
- ↑ 열왕기하 24-25장.
- ↑ 마노 다카야 (2000. 9. 7.), “바빌론”, 《낙원》 (도서출판 들녘),
이 나보폴라사르 왕의 아들이 네부카드네자르 2세(Nebuchadenezzar Ⅱ: 재위 B.C. 605~B.C. 562)이다. 그는 아버지가 이룩한 제국을 더욱 강한 나라로 확대했다. 성서 속에서 그의 '악명'만이 눈에 띄는 것은 구약성서에 기록된 '예루살렘의 전투'에서 승리하여 방대한 전리품과 함께 많은 유대인 포로를 연행했기 때문이다. ... 네부카드네자르는 이렇게 얻은 부와 권력을 아버지가 못다 이룩한 사업에 투자했다. ... 도시 재건을 위해서 '북에서 남까지, 산간지역에서 해안지대까지 제국 안에 있는 모든 사람'을 동원했다고 비문에 적혀 있다. 이렇게 해서 만들어진 도시는 '우리가 알고 있는 다른 어떠한 도시보다 아름답게 정비된 도시'(헤로도토스에 의하면)라고 절찬받을 정도로 완성도가 높았다. 사람들은 이 낙원과도 같은 도시에서의 생활을 구가했을 것이다.
- ↑ Mene(수를 세었다), Tekel(무게를 달았다), U(그리고), Parsin(나누어지다, Peres의 수동 분사형)
- ↑ 예술혼을 위하여 (111 -페르시아와 바빌론의 유수. 《브레이크뉴스》. 2017. 7. 11.
이러한 '나보니도스 왕' 시대에 페르시아 아케메네스 제국을 창건한 '키루스 대왕'(Cyrus the Great. BC. 580~BC. 529)이 BC. 540년 엘람 왕국의 수도이었던 수사(Susa)를 점령한 이후 신바빌로니아를 침략하였습니다. '나보니도스 왕'의 아들 '벨사살'(Belshazzar. ?~BC. 539)이 군 사령관으로 끝까지 저항하였으나 거대한 역사의 물결 아케메네스 제국에 무릎을 꿇어 BC. 539년 '나보니도스 왕'이 신바빌로니아 왕국의 마지막 왕으로 역사에 남게 된 것입니다.
- ↑ 영어 원문: As for me, Nabonidus, king of Babylon, save me from sinning against your great godhead and grant me as a present a life long of days, and as for Belshazzar (He is mentioned as son of Nebuchadnezzar and king of Babylonia in Daniel 5. Belshazzar is his name in the Bible; Bel-šar-usur is a better rendering of his real name), the eldest son-my offspringinstill reverence for your great godhead in his heart and may he not commit any cultic mistake, may he be sated with a life of plenitude.
- ↑ "תֵּימָא", 《로고스 스트롱코드 히브리어사전》, "사막, 경작되지 않은 지역: 시리아 사막 변경에 위치한 아라비아 광야의 북부 지역에 위치한 나라 '데마'[이스마엘의 아들 데마에서 유래], 창25:15."
- ↑ ABC 7 (Nabonidus Chronicle). 《Livius.org》.
게다가 우리는 나보니도스가 바벨론에 10년 동안 없었다는 것을 알게 된다. 대신에 그는 아라비아를 지배하려 했던 것으로 보인다. 제3년에 그는 바벨론에서 아카바만으로 가는 직통 도로를 장악하던 에돔 왕국을 정복했다. 나보니두스는 제7년부터 제16년까지 아랍 사막에 있는 타이마의 오아시스에 머물렀고, 그곳에서부터 남쪽의 오아시스 야트리브(현재의 메디나)까지 쉽게 갈 수 있었다[In addition, we learn that Nabonidus was not in Babylon for ten years. Instead, he seems to have tried to subject Arabia. In year three he conquered the kingdom Edom, which controls the direct road from Babylon to the Gulf of Aqaba. From year seven until year sixteen, Nabonidus stayed in the oasis of Tayma in the Arab desert, from where he could easily go as far south as the oasis Yatrib (modern Medina)].
- ↑ 문학과 과학, 예술에 중점을 두고 발행된 잡지로, 영국에서 1828년에서 1921년 사이에 출판된 영향력 있는 정기간행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