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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2년 6월 27일 (월) 02:38 판
시오니즘(Zionism, 시온주의)은 유대인들이 조상의 땅 팔레스타인에 유대 국가를 건설하는 것을 목표로 전개한 민족주의 운동이다. 19세기 후반에 유럽 일부 국가에서 진행되었으며, 세계대전을 겪은 뒤 전 세계 유대인의 마음이 시오니즘으로 결집됐다. 1948년 이스라엘은 팔레스타인 땅에 독립 국가를 건설함으로써 시오니즘의 목표가 실현되었다.
성경에서 시온은 단순히 이 땅의 장소만이 아닌 하나님이 함께하시며 영생의 축복을 허락하시는 영적인 장소를 가리키기도 한다. 이런 의미에서 오랜 세월 동안 고국의 독립을 향한 소망을 꺼뜨리지 않았던 유대인들의 정신은, 하나님의 절기를 지키며 영적 시온 건설에 힘쓰는 성도들에게 좋은 본보기가 되고 있다.
시오니즘의 어원
시오니즘 즉 시온주의라는 단어에는 고대 이스라엘 땅인 팔레스타인에 대한 유대인의 민족주의적인 염원이 담겨 있다.
시온은 예루살렘에 자리 잡은 언덕 중 하나를 지칭하는 단어지만, 성경에서는 본래의 지리적 의미보다 예루살렘 전체나 이스라엘을 상징하는 단어로 자주 언급되었다. 또한 하나님이 거하시는 곳, 하나님이 통치하는 곳이라는 거룩한 의미가 더해졌으며,[1][2] 나라를 잃은 이스라엘 민족에게 시온은 그리운 고향이자[3] 구원자가 오셔서 회복해 주실 약속의 땅[4]을 의미하게 되었다.
이스라엘 나라가 형성된 후 가나안에 살던 이스라엘 백성이 이방에 흩어졌다가 고향 땅으로 돌아온 역사는 두 번 있었다.
분열왕국시대 남 유다는 기원전 586년경 바벨론(신바빌로니아)에 의해 멸망을 당했다.[5] 바벨론에 포로로 잡혀간 당시 백성들은[6] 황폐해진 시온을 생각하고 눈물 흘렸다.[3] 하지만 70년이 마치면 포로에서 해방시켜 주겠다는 하나님의 약속[7]대로 유다 민족은 70년 후 고향에 돌아와 시온을 재건했다.[8][9]
두 번째 역사는 예수님이 부활 승천하신 후에 이루어졌다. 기원후 70년 예루살렘은 로마군의 공격으로 함락되고, 성전과 성벽은 예수님의 예언대로 '돌 위에 돌 하나도 남김없이' 철저하게 파괴되었다.[10][11] 유대인들은 전 세계에 흩어져 나라 없는 유랑민이 되어 갖은 고생과 멸시를 받으며 살게 되었고, 그 외에 남은 유대인들은 외국 지배자의 학대를 받으며 지내왔다. 조상의 땅에서 쫓겨나 전 세계에 흩어진 유대인들의 마음에는 시온을 향한 소망이 더욱 커졌다. 고국을 되찾겠다는 소망을 시오니즘이라 칭한 것은 이 때문이다. 그러다 1948년, 기적처럼 이스라엘 독립 국가를 건설했다.
시오니즘이라는 용어는 오스트리아 출신 네이선 번바움(Nathan Birnbaum)이 자신의 정기간행물 「자기해방(Selbstemanzipation)」 1890년 4월 1일자에서 처음 사용했다. 그는 시오니즘을 '에레츠 이스라엘(אֶרֶץ יִשְׂרָאֵל, '이스라엘 땅'이라는 뜻으로, 고대 이스라엘 민족이 살던 팔레스타인 지역을 가리킨다)을 향한 정치적 시온주의자 정당'이라고 정의했다.[12] 시오니즘을 통해 유대 사회에서 큰 반향을 일으킨 사람은 테오도어 헤르츨이다.
역사
시오니즘의 탄생 배경
유럽 사회에 만연한 반(反)유대주의 정서
기원후 70년 로마에 의해 이스라엘이 멸망하고, 유대인들은 유럽 각지에 뿔뿔이 흩어졌다. 그러나 유대인을 향한 유럽 사회의 시선은 곱지 않았다. 기독교가 각국에 전파되면서 유대인은 예수님을 배척한 민족이라고 탄압받았다. 선민의식을 기반으로 자신들의 문화와 전통만을 고수하는 유대인의 모습 또한 반감의 원인이 되었다. 상업이나 금융업에서 성공을 거둔 유대인이 많다는 점도 금전에 집착이 강한 민족이라는 편견을 낳게 했다.[13]
중세 이후 유럽 각 지역에서는 유대인들을 분리된 지역인 '게토'로 강제 이주시켜 생활 구역을 제한했다.[14] 페스트(흑사병)가 유럽을 강타했을 때는 검은 역병을 전파한다는 오명을 씌워 유대인들을 화형시켰다. 유대인이 우물에 독을 풀었다는 유언비어가 돌았기 때문이다.[15] 이런 상황에서 유럽의 문화에 동화되거나 주변의 핍박과 학대를 이기지 못해 유대인으로서의 정체성을 포기한 사람들이 생겨났다.
유월절을 지키며 시온을 그리워한 유대인들
반면 서러움과 핍박을 겪더라도 하나님의 언약을 지키며 살아가는 유대인들도 있었다. 이들은 세계 각국에서 이방인이 되어 갖은 고생을 겪으면서도 고향을 잊지 않고 시온성의 회복을 항상 부르짖었다. 시온의 회복에 대한 선지자들의 예언[16][17]을 절대적으로 믿고 그날이 오기를 고대하며, 매년 유월절을 지켰다.
원래 이스라엘 민족은 유월절을 시온, 곧 예루살렘에 모여 지켰으나[18][19] 성전이 파괴된 후에는 가정에서 유월절을 지키며 고향 땅 시온을 그리워했다.[20] 마치 구약시대 다니엘이 바벨론에 매여 살 때 예루살렘을 향해 열린 창문 쪽으로 기도한 것과 같고,[21] 바벨론에 잡혀간 유다 백성이 시온, 곧 예루살렘을 그리워하며 울었던 것과 같았다.[3]
19세기 말: 시오니즘의 태동
호베베이 시온 결성과 1차 알리야
19세기에 이르러 유대인을 향한 차별과 증오는 더욱 심해졌다. 그 무렵 유대인들 사이에서 조국 시온의 회복을 바라는 소망을 구체적으로 실현시키려는 움직임이 시작됐다.
1881년 러시아 황제 차르 알렉산더 2세가 암살당했는데 러시아 정부는 이를 제정 러시아를 전복하려는 유대인들의 음모라고 발표했다. 그로 인해 러시아에서 유대인들을 대상으로 대대적인 약탈과 학살이 자행됐다. 이를 계기로 러시아의 유대인들은 유럽 사회에 동화하려 했던 그들의 노력이 허황된 꿈이었음을 깨닫고, '호베베이 시온(חובבי ציון, Hovevei Zion, 시온을 사랑하는 자들)'을 결성하여 유대인의 팔레스타인 이주를 장려했다. 이스라엘 땅에 자신들의 거처를 마련해야 한다는 생각이었다. 1882-1903년 사이에 약 3만 5000명의 유대인이 팔레스타인으로 이주했다. 이를 1차 알리야(Aliyah)라고 부른다. 알리야는, 고대에는 성지에 올라가는(עָלָה) 것을 의미했는데 오늘날에는 다른 나라의 유대인들이 이스라엘로 이민하는 것을 지칭하게 되었다.[22][23]
드레퓌스 사건과 시오니즘의 확산
시오니즘을 유대 민족주의 운동으로 확산시킨 인물은 테오도어 헤르츨(Theodor Herzl, 1860-1904년)이었다. 헝가리 부다페스트의 유복한 유대인 집안에서 태어난 헤르츨은 오스트리아에서 저널리스트로 활동하고 있었다. 그러다 통신원 자격으로 프랑스 파리에 머무르던 중에 드레퓌스 사건을 목격했다.
1894년, 프랑스의 유대인 장교였던 알프레드 드레퓌스가 독일대사관에 군사 정보를 팔았다는 혐의로 체포되어 별다른 증거도 없이 종신형을 선고받았다. 유대인이라는 이유 때문이었다. 파리 시민들은 무죄를 항변하는 드레퓌스를 향해 "유대인을 죽여라" 하고 외쳤다.[24][25]
헤르츨은 이 사건에 큰 충격을 받았고, 유대인이 유럽 사회에 동화되는 방식으로는 반유대인 문제를 해결할 수 없다고 생각하게 됐다. 그는 1896년 「유대인 국가(Der Judenstaat)」라는 책을 출간하며 박해에서 벗어날 수 있는 유일한 길은 유대 국가 건설이라고 주장했다.
“ 내가 이 글에서 상세히 논의하는 사상은 매우 오래된 것이다. 그것은 유대 국가의 수립이다. 세계에는 유대인들에 반대하는 외침이 메아리치고 있으며, 그것은 고이 잠들어 있는 사상을 일깨우고 있다. “ — 테오도어 헤르츨 (2012.11.26), 《유대 국가》, 도서출판 b
시오니즘 운동의 본격화
헤르츨의 책은 유대인 사회에 큰 반향을 일으켰고 1897년 스위스 바젤에서 제1차 시온주의자 회의(Zionist Congress)가 열렸다. 시오니즘 운동이 본격화된 것이다. 이 자리에서 팔레스타인에 국제법으로 보장되는 유대인 국가를 세운다는 강령을 마련했다. 시온주의자 회의는 훗날 이스라엘 건설의 정치적·조직적 기반이 되었다. 1960년에는 세계 시온주의자 기구(World Zionist Organization, WZO)로 이름을 바꾸었다.
시온주의자들, 즉 헤르츨을 비롯한 유대인들은 외교적 협상을 통해 유대인 국가 건설을 이루고자 노력했다. 1901년 헤르츨은 당시 팔레스타인을 지배하던 오스만튀르크 제국(지금의 '터키')에 팔레스타인 자치권을 요구했으나 거절당했다.[26]
이듬해 그는 영국에서 유대인 이민에 관해 논의했다. 1903년 영국 정부는 아프리카 우간다의 비거주 지역에 독립 국가를 세우라고 제의했다. 다시 얻기 어려운 절호의 기회였지만 헤르츨은 제안을 거절했다. 우간다는 시온이 아니며, 유대 국가는 팔레스타인에 건설되어야만 한다는 이유에서였다.[16][27][28]
선조의 땅으로 돌아가자는 염원을 품고 노력하던 헤르츨은 건강이 악화되어 1904년 7월 3일에 44세의 일기로 세상을 떠나고 말았다.
헤르츨이 죽은 뒤 시오니즘 운동은 구심점을 잃는 듯했으나 러시아 출신의 소수 유대인이 주도하게 되었다.[29] 1905년, 러시아에서는 혁명이 실패하자 책임을 유대인에게 돌리고 유대인 집단 학살 '포그롬(Pogrom)'을 자행했다.[30] 많은 유대인들이 러시아의 학살을 피해 팔레스타인으로 이주했다.
1914-1918년: 제1차 세계대전과 밸푸어 선언
제1차 세계대전(1914-1918)이 발발하면서 시오니즘 운동은 크게 확산되어 정치적 힘을 발휘하기 시작했다. 특히 훗날 이스라엘의 초대 대통령이 된 바이츠만(Chaim Weizmann)은 1917년 영국으로부터 팔레스타인 내의 유대 민족국가 건설에 대한 지지를 얻어냈다. 영국의 외무장관 아서 밸푸어(Arthur J. Balfour)가 그해 11월 2일, '팔레스타인 내 유대인 민족국가 건설을 지지한다'는 밸푸어 선언(Balfour Declaration)을 발표한 것이다. 그 배경에는 팔레스타인 지방을 단독 지배하려는 영국의 정치적 의도가 있었지만, 유대인 입장에서는 최초로 국제 사회에서 시오니즘 운동을 인정한 역사적 선언이자 약 2000년 동안 잃어버렸던 '약속의 땅'을 다시 찾을 수 있다는 희망의 선언이었다.
“ 외교부 사무실
1917년 11월 2일
로스차일드 경에게
국왕 폐하 정부를 대신해서, 유대인 시오니스트들의 염원이 담긴 아래 선언문을 내각에 제출, 승인받은 사실을 전하게 되어 기쁩니다.
우리 국왕 정부는 팔레스타인에 유대인의 민족적 국가를 세우는 것을 지지합니다. 그리고 유대인들이 이 목표를 성취하기 위해 최대한 노력하기를 바랍니다. 또한 팔레스타인에 거주하는 비유대인의 시민적 그리고 종교적인 권리나, 다른 국가에 거주하는 유대인들의 정치적인 지위와 권리에 아무런 침해도 하지 않을 것입니다.
이 선언을 시온주의 연맹에 알려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 아서 J. 밸푸어
1920-1930년대: 본격적인 팔레스타인 귀환 운동
팔레스타인 귀환 운동인 알리야는 꾸준히 진행되고 있었다.
헤르츨 사후 1904년부터 1914년까지 진행된 2차 알리야는 주로 러시아에서 온 젊은 남녀였으며 총 4만 명이 팔레스타인으로 이주했다. 제1차 세계대전이 발발하고 잠시 중단되었던 알리야는 1919년부터 재개되었으며 1923년까지 총 3만 5000명의 유대인이 동유럽 국가에서 팔레스타인으로 이주했다. 이것이 3차 알리야다. 제4차 알리야(1924-1928)의 귀환자는 6만 7000명이었지만 그중 상당수가 팔레스타인을 떠났다. 대대적인 팔레스타인 귀환 운동은 1929년부터 1939년까지 전개되었는데, 5차 알리야로 25만 명 이상의 유대인이 팔레스타인 땅으로 돌아왔다.[31]
팔레스타인으로 귀환한 유대인들은 도시 및 농촌에 정착촌(Yishuv), 보건소, 도로 항만 등을 건설해 유대인 자치 조직을 꾸렸으며 교육 기관을 세워 유대 문화와 히브리어 교육을 진행했다. 앞서 언급한 것처럼 1차 세계대전 이후 이민자 수가 급증해서 유대인들의 정착지는 계속 늘었고, 10년 동안 인구도 16만 명으로 늘었다. 1925년 3월의 공식 집계에 따르면, 당시 팔레스타인에 살고 있는 유대인은 10만 8000명 정도였으며, 1933년 무렵 이 숫자는 대략 23만 8000명으로 늘어났다. 1930년대에 이르러 이민은 더욱 급증하여 1939년에는 50만 명으로 집계됐다.[32][33]
유대인들이 팔레스타인으로 모여들자 팔레스타인에 살고 있던 아랍인들이 강하게 반대하기 시작했다. 오스만튀르크 제국은 유대인들의 이주를 금지했지만, 이후에 팔레스타인을 점령한 영국은 초기에는 유대인의 유입을 자유롭게 허용했다. 하지만 양측의 갈등이 심해지자 한 해에 이주하는 유대인의 숫자를 제한했다.[34] 유대인들은 실패를 거듭해 가면서도 성경 속 선지자들의 예언이 성취되기를 소망하며 끈질기게 유대 국가 건설을 바랐다.
구약시대 유다 백성이 바벨론에 포로로 잡혀갔을 때, 구약 선지자들은 형벌의 기간이 마치면 시온이 회복되고 하나님의 백성은 시온으로 돌아오게 될 것이라 예언했다.[16][17]
여호와여 주는 영원히 계시고 주의 기념 명칭은 대대에 이르리이다 주께서 일어나사 시온을 긍휼히 여기시리니 지금은 그를 긍휼히 여기실 때라 정한 기한이 옴이니이다 ... 대저 여호와께서 시온을 건설하시고 그 영광 중에 나타나셨음이라 여호와께서 빈궁한 자의 기도를 돌아보시며 저희 기도를 멸시치 아니하셨도다 ... 이는 갇힌 자의 탄식을 들으시며 죽이기로 정한 자를 해방하사 여호와의 이름을 시온에서, 그 영예를 예루살렘에서 선포케 하려 하심이라 때에 민족들과 나라들이 모여 여호와를 섬기리로다
선지자들의 예언은 1차적으로 유대인들이 기원전 6세기 바벨론에서 해방되어 시온으로 돌아옴으로 성취되었다. 유대인들은 비록 하나님에게 범죄해서 열방에 흩어지더라도 때가 되면 하나님이 그들을 불쌍히 여기시며 다시 고향에 돌아오도록 하신다는 사실을 배운 것이다. 20세기의 유대인들은 이 예언이 또 한번 성취될 것을 확신하고 시온의 회복을 간절히 바라왔다.
어려움과 핍박 속에서도 멈출 줄 몰랐던 그들의 노력으로 이스라엘 나라가 옛 조상의 땅에 회복되는 기적이 일어났다. 하지만 그 과정은 결코 순탄치 않았다.
1939-1945년: 제2차 세계대전과 유대인 대학살
기원전 1500년경, 모세가 애굽(이집트)에서 이스라엘 백성을 내보내줄 것을 바로(파라오)에게 요청했을 때, 바로는 오히려 마음이 강퍅해져 이스라엘 백성들의 노역을 더 중하게 하고 그들을 학대했다.[35] 1900년 동안 유럽에 흩어져 학대를 받던 이스라엘 백성이 나라를 회복하려고 노력할 무렵에도 마찬가지였다. 유대인들은 독립 직전에 인류 역사의 최대의 대학살, 즉 홀로코스트(Holocaust)를 겪게 되었다.
1933년 1월, 1차 세계대전에서 패한 독일에서 나치당의 지도자 '아돌프 히틀러'가 총리가 되었다. 히틀러와 나치당은 극단적인 반유대주의를 선동했고 유대인 억압 정책을 펴나갔다. 이들은 유대인을 바이러스를 옮기는 해충으로 취급하며 박멸되어야 할 열등한 종자라고 주장했다.[36]
제2차 세계대전(1939-1945년)이 일어난 뒤 독일과 독일의 점령지인 중부, 동부 유럽에서 유대인들은 유대인 등록증을 소지하고 다녀야 했고 강제 입영, 게토 이주 등 일상의 자유마저 빼앗겼다.[37] 급기야는 눈에 띄는 대로 체포당해 아우슈비츠 수용소 등지로 보내졌다. 1933년부터 세계대전이 종식되는 1945년까지 당시 유럽에 살고 있던 약 1100만여 명의 유대인들 가운데 절반이 넘는 600만 명의 유대인들이 학살당했으며, 이 중 150만 명이 어린아이였다.[38][39]
여인들은 노소를 가릴 것 없이 나체로 끌려다녔으며 유대인들은 강제 노동과 기아와 질병으로 죽어가거나 가스실에서 집단으로 학살당했다.[40] 많은 사람들이 보는 앞에서 교수대에 달리거나 총살당하기도 했다.
나 여호와가 말하노라 내가 내 백성 이스라엘과 유다의 포로를 돌이킬 때가 이르리니 내가 그들을 그 열조에게 준 땅으로 돌아오게 할 것이라 그들이 그것을 차지하리라 ... 여호와께서 이같이 말씀하시되 우리가 떨리는 소리를 들으니 두려움이요 평안함이 아니로다 너희는 자식을 해산하는 남자가 있는가 물어보라 남자마다 해산하는 여인같이 손으로 각기 허리를 짚고 그 얼굴빛이 창백하여 보임은 어찜이뇨 슬프다 그날이여 비할 데 없이 크니 이는 야곱의 환난의 때가 됨이로다마는 그가 이에서 구하여 냄을 얻으리로다
야곱의 환난은, 구약시대 이스라엘의 조상 야곱이 고향으로 돌아갈 때에 겪은 일을 의미한다. 모든 가족과 재산을 얍복강 건너편에 보내고 홀로 남은 야곱은 큰 두려움과 고민으로 밤새도록 어떤 사람과 씨름했다. 그 과정에서 환도뼈가 위골되었지만 고통 속에서도 축복을 간구한 끝에 하나님의 축복을 받고 무사히 고향으로 돌아갔다.[41] 이같이 열국에 흩어졌던 유대인들은 다시 조국을 찾게 될 무렵 큰 희생을 당했지만 결국 나라를 얻게 되었다.
1948년: 이스라엘의 독립
홀로코스트를 겪은 유대인들은 조상의 땅 팔레스타인을 더욱 염원하게 되었으며, 유럽뿐 아니라 미국에 사는 유대인들도 시오니즘에 동참해 수많은 유대인들이 팔레스타인으로 이주했다.[42][43]
이에 따라 아랍인과 유대인 사이의 긴장은 갈수록 고조되었고, 영국은 이 문제를 유엔(UN)에 상정했다. 1947년 유엔회의에서 팔레스타인을 아랍국과 유대국으로 분할하고 예루살렘은 국제 관리 아래 둔다는 내용이 가결되었다.[44]
1948년 5월 14일 이스라엘은 독립 헌장을 발표했다. 예루살렘이 멸망하고 1900년 만의 일이었다. 오후 4시, 팔레스타인 지역 곳곳에 흩어져 있던 65만 명의 유대인들은 라디오에서 흘러나오는 벤구리온의 목소리를 들었다.[45]
“ "유대 민족의 역사적 권리와 국제 연합의 결의에 따라 팔레스타인에 유대 국가를 수립하고 이를 이스라엘이라고 부를 것을 선포한다."
목소리의 주인공은 제1차 세계대전 이후 유대인들의 시오니즘을 이끌었으며, 새로 태어난 이스라엘의 초대 수상으로 선출된 벤 구리온이었다.“ — 이희영 (2004), 《솔로몬 탈무드》, 동서문화사, 7-8쪽
숱한 어려움을 겪은 뒤에 나라를 회복한 유대인들은 현재도 '나라가 있어야 국민이 살 수 있다'는 마음으로 조국을 위해 헌신한다.[46] 또한 지나간 역사 속의 고난을 잊지 않으려고 예루살렘 근처에 '야드바솀 홀로코스트박물관'(Yad Vashem Holocaust History Museum)을 세웠다. '야드바솀'은 '기념물과 이름'[47]이라는 뜻으로 야드바솀 기념박물관은 유럽에서 나치에 의해 희생된 600만 명을 추모하는 곳이다. 박물관에 진열된 사진과 유품들은 유대 민족이 세계 곳곳에 흩어져 당하던 학대, 모욕 등을 한눈에 볼 수 있게 한다.
시온의 회복을 향한 사그라들지 않는 염원은 이스라엘의 애국가에 고스란히 담겼다.
“ 이 마음에 유대인의 영혼이 여전히 갈망하는 한 / 저 멀리 동방의 끝을 향하여 / 시온을 향하여 바라보고 있는 한 / 우리의 희망은 아직 사라지지 않았네 / 2천 년간 이어져 온 그 오랜 희망 / 우리의 땅에 속박 없는 나라를 세우리라는 그 희망, 시온과 예루살렘의 그 땅에. “ — 이스라엘 애국가 '하티크바(Hatikvah, 희망)'
오늘날의 시오니즘
시오니즘 운동의 궁극적인 목적인 '이스라엘 독립'은 마침내 실현되었다. 하지만 이는 중동 지역 내에서 아랍 국가와 이스라엘 사이의 끊임없는 분쟁을 야기했다. 오늘날에는 시오니즘 운동을 자국을 지키려는 이스라엘 민족의 노력을 가리키는데, 이스라엘 안팎에서 발생하는 테러 행위와 아랍 국가의 영토 분쟁에 둘러싸인 무력 투쟁으로 차츰 변질되었다.[48]
1968년, 예루살렘에서 열린 제27차 시온주의자 회의에서는 시오니즘의 프로그램으로 다음과 같은 5개 항을 결의했다.[49]
① 유대 민족을 통합하고, 이스라엘을 유대인의 삶의 중심으로 삼는다.
② 흩어진 모든 나라로부터 유대인을 역사적인 조국으로 불러 모은다.
③ 유대 국가를 정의와 평화 위에 굳게 세워 나간다.
④ 모든 유대인에게 히브리어, 유대 문화, 유대 정신을 교육시킴으로써, 유대 민족의 자기 동일성과 특성을 보존해 나간다.
⑤ 유대인의 권리를 보호한다.
하지만 이스라엘 밖에 있는 유대인들은 포로지에 사는 것이며 이스라엘에서만 유대인이 온전히 살 수 있다는 시온주의자의 강경한 견해는 유대인 내에서도 갈등을 초래하는 씨앗이 되고 있다.[50]
교훈
성경 속에서 시온은 단순히 이스라엘 국가만을 의미하지는 않는다. 하나님이 거하시며 죄 사함을 허락하시는 장소, 영생의 축복을 내려주시는 거룩한 장소로 표현되어 있다.[51][52] 그렇다면 이스라엘 백성의 역사와 시온성 회복은 영적 이스라엘 백성들과 영적 시온성의 당할 일을 보여주는 거울이 되는 것이다.[53][54]
영적 시온은 하나님의 절기를 지키는 곳이다.[55] 예수님은 절기를 지키시며 당신의 백성들에게 구원의 처소인 영적 시온을 건설해 주셨다. 하지만 사도들이 다 세상을 떠난 후 불법의 활동은 교회 내에서 큰 세력을 잡았고[56] 급기야 예수님이 친히 세워주신 진리들을 하나씩 변경했다. 321년 안식일이 사라지고 일요일을 예배의 날로 규정한 법령이 내려졌으며, 325년에는 유월절 절기가 완전히 폐지되고 말았다. 육적 시온이 황폐해진 것처럼, 예수님이 시온을 건설하려 하나하나 쌓아올린 새 언약 절기들이 모두 무너지고 영적 시온은 완전히 황폐해진 것이다. 그 후 진리를 지키려는 사람들은 이단으로 취급받았고 심지어 사형까지 당하게 되는 종교 암흑 시대가 되고 말았다.
이스라엘 민족은 2000년에 가까운 긴 유랑생활 중에도 고국 건설에 대한 소망을 놓지 않았고, 고국의 독립을 위해 힘썼다. 믿음의 선진들은 영의 고향인 천국 돌아가기를 간절히 바라며 끝까지 새 언약 절기를 지켰다. 이 같은 정신은 오늘날 하나님의 절기를 지키고 전하며 전 세계에 영적 시온을 건설함으로 만민을 천국으로 인도하는 일에 힘쓰는 성도들에게 좋은 본보기가 되고 있다.
같이 보기
각주
- ↑ 이사야 8:18.
보라 나와 및 여호와께서 내게 주신 자녀들이 이스라엘 중에 징조와 예표가 되었나니 이는 시온산에 계신 만군의 여호와께로 말미암은 것이니라
- ↑ 이사야 24:23.
그때에 달이 무색하고 해가 부끄러워하리니 이는 만군의 여호와께서 시온산과 예루살렘에서 왕이 되시고 그 장로들 앞에서 영광을 나타내실 것임이니라
- ↑ 3.0 3.1 3.2 시편 137:1, 5-6.
우리가 바벨론의 여러 강변 거기 앉아서 시온을 기억하며 울었도다 ... 예루살렘아 내가 너를 잊을진대 내 오른손이 그 재주를 잊을지로다 내가 예루살렘을 기억지 아니하거나 내가 너를 나의 제일 즐거워하는 것보다 지나치게 아니할진대 내 혀가 내 입천장에 붙을지로다
- ↑ 시편 102:12-22.
여호와여 주는 영원히 계시고 주의 기념 명칭은 대대에 이르리이다 주께서 일어나사 시온을 긍휼히 여기시리니 지금은 그를 긍휼히 여기실 때라 정한 기한이 옴이니이다 주의 종들이 시온의 돌들을 즐거워하며 그 티끌도 연휼히 여기나이다 ... 대저 여호와께서 시온을 건설하시고 그 영광 중에 나타나셨음이라
- ↑ 성경 내용 사실?…'바빌로니아 예루살렘 정복' 증거 찾았다. 《뉴스1》. 2019. 8. 13.
고대문명인 바빌로니아 왕국이 예루살렘을 정복했다는 고고학적 증거가 발견됐다. ... 깁슨은 이러한 점을 언급하며 "이번에 발견된 유물들은 바빌로니아가 예루살렘을 정복했음을 시사한다"며 "이 기간 동안 예루살렘에서 일어난 전쟁은 기원전 587~586년에 바빌로니아가 예루살렘을 공격한 것 외에는 없기 때문"이라고 설명했다.
- ↑ 역대하 36:17-20.
하나님이 갈대아 왕의 손에 저희를 다 붙이시매 저가 와서 그 성전에서 칼로 청년을 죽이며 청년 남녀와 노인과 백발노옹을 긍휼히 여기지 아니하였으며 또 하나님의 전의 대소 기명들과 여호와의 전의 보물과 왕과 방백들의 보물을 다 바벨론으로 가져가고 또 하나님의 전을 불사르며 예루살렘 성을 헐며 그 모든 궁실을 불사르며 그 모든 귀한 기명을 훼파하고 무릇 칼에서 벗어난 자를 저가 바벨론으로 사로잡아가매 무리가 거기서 갈대아 왕과 그 자손의 노예가 되어 바사국이 주재할 때까지 이르니라
- ↑ 예레미야 25:11-14.
이 온 땅이 황폐하여 놀램이 될 것이며 이 나라들은 칠십 년 동안 바벨론 왕을 섬기리라 나 여호와가 말하노라 칠십 년이 마치면 내가 바벨론 왕과 그 나라와 갈대아인의 땅을 그 죄악으로 인하여 벌하여 영영히 황무케 하되 ... 내가 그들의 행위와 그들의 손의 행한 대로 보응하리라 하시니라
- ↑ 에스라 3:8-13.
예루살렘 하나님의 전에 이른 지 이 년 이월에 ... 예루살렘에 돌아온 자들이 역사를 시작하고 이십 세 이상의 레위 사람들을 세워 여호와의 전 역사를 감독하게 하매
- ↑ 에스라 6:15-22.
다리오왕 육 년 아달월 삼 일에 전을 필역하니라 이스라엘 자손과 제사장들과 레위 사람들과 기타 사로잡혔던 자의 자손이 즐거이 하나님의 전 봉헌식을 행하니 ... 정월 십사 일에 유월절을 지키되 ... 즐거우므로 칠 일 동안 무교절을 지켰으니 이는 여호와께서 저희로 즐겁게 하시고...
- ↑ 마태복음 24:1-2.
예수께서 성전에서 나와서 가실 때에 제자들이 성전 건물들을 가리켜 보이려고 나아오니 대답하여 가라사대 너희가 이 모든 것을 보지 못하느냐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돌 하나도 돌 위에 남지 않고 다 무너뜨리우리라
- ↑ {양병우 (1990), 《대세계의 역사 3권》, 삼성문화개발, 152-153쪽,
군대를 철수하고 사태를 주시하던 베스파시아누스도 다음 해 9월 동부 제군단에 의하여 황제로 추대된다. 그리하여 A.D. 70년에는 비텔리우스를 물리치고 로마에서 정식으로 즉위하였다. 이와 같이 로마 정변이 수습되자 예루살렘 공략전이 다시 시작되었다. 베스파시아누스제의 아들 티투스는 14군단을 이끌고 4월부터 9월 말까지 격심한 공격을 퍼부었다. 이리하여 신전도 성벽도 도시도 다 불타버려 ... 포위 공격 되어 전사한 자가 110만, 포로 9만 7천이라 전해진다.
- ↑ 최창모 (2007.9.12.). 이스라엘사. 대한교과서.
시온주의(Zionism)라는 용어는 19세기 말 나단 번바움이 처음으로 사용한 용어이다. 그는 1890년 4월 1일자 잡지인 「Selbstemanzipation」에서 시온주의를 '에레츠 이스라엘을 향한, 과도기에 설치한 민족적, 정치적 시온주의자 정당'이라고 정의하였다. 그는 이 글에서 시온주의를 정치적 개념으로 정의하였다.)
- ↑ 유대인이란 이유만으로 ... 간첩 누명 쓰고 종신형. 《중앙일보》. 2012.6.17.
반유대주의의 원인은 세 가지다. 첫째는 종교적 요인이다. 유대교와 기독교는 모두 뿌리가 같은 유일신교다. 그렇지만 유대교는 예수를 메시아로 인정하지 않는다. 또 기독교는 예수를 죽음으로 몬 배후는 유대인이었다고 주장한다. 둘째는 유대인의 선민의식이다. 유대인은 유럽 각국에 붙어살면서도 선민의식에 가득찬 교만함을 보였다. ... 그리고 가장 중요한 세 번째 이유가 있다. 소수인 유대인은 유럽 각국에서 유랑하면서도 여러 분야에서 두각을 나타냈다. 일부는 주류 사회에도 진출하고 또 지도층으로 행세하려 했다.
- ↑ 게토에 갇힌 유대인, 어떻게 부를 쌓았나. 《한겨레21》. 2021.3.3.
유럽의 기독교 세계가 중세를 지나면서 유대인은 두 계급으로 양극화했다. 궁정의 유대인과 게토의 유대인이다. ... 대다수 유대인은 게토라는 집단격리 구역에 갇혀 비천하게 사는 기독교 세계의 국외자였다. ... 14세기 흑사병 창궐은 유대인을 서유럽에서 결정적으로 몰아내는 계기였다.
- ↑ [숨은 역사 2cm] 1666년 런던 대화재로 흑사병 사라지고 화재보험 탄생했다. 《연합뉴스》. 2017. 6. 19.
유럽인 약 2천500만 명의 목숨을 앗아간 흑사병이 한동안 잠잠하다가 화재 1년 전인 1665년 런던에서 다시 창궐해 무려 6만8천여 명이 숨졌다. 그해 4월부터 온몸이 새까맣게 변해가며 죽는 환자가 속출해 런던 도심에 시체가 즐비했고, 악취가 진동했다. … 유대인과 노숙인, 집시는 희생양이 됐다. 마을 우물 등에 독을 타거나 병균을 퍼트린다는 유언비어가 퍼졌기 때문이었다.
- ↑ 16.0 16.1 16.2 예레미야 50:4-6.
나 여호와가 말하노라 그날 그때에 이스라엘 자손이 돌아오며 그와 함께 유다 자손이 돌아오되 그들이 울며 그 길을 행하며 그 하나님 여호와께 구할 것이며 그들이 그 얼굴을 시온으로 향하여 그 길을 물으며 말하기를 너희는 오라 잊어버리지 아니할 영영한 언약으로 여호와와 연합하자 하리라
- ↑ 17.0 17.1 스바냐 3:14-20.
시온의 딸아 노래할지어다 이스라엘아 기쁘게 부를지어다 예루살렘 딸아 전심으로 기뻐하며 즐거워할지어다 여호와가 너의 형벌을 제하였고 너의 원수를 쫓아내었으며 이스라엘 왕 여호와가 너의 중에 있으니 네가 다시는 화를 당할까 두려워하지 아니할 것이라 그날에 사람이 예루살렘에게 이르기를 두려워하지 말라 시온아 네 손을 늘어뜨리지 말라 너의 하나님 여호와가 너의 가운데 계시니 그는 구원을 베푸실 전능자시라 ... 그때에 내가 너를 괴롭게 하는 자를 다 벌하고 저는 자를 구원하며 쫓겨난 자를 모으며 온 세상에서 수욕받는 자로 칭찬과 명성을 얻게 하리라
- ↑ 누가복음 2:41.
그 부모가 해마다 유월절을 당하면 예루살렘으로 가더니
- ↑ 요한복음 11:55.
유대인의 유월절이 가까우매 많은 사람이 자기를 성결케 하기 위하여 유월절 전에 시골서 예루살렘으로 올라갔더니
- ↑ 사이먼 시백 몬티피오리 (2012.5.30.), 《예루살렘전기》, 시공사, 621쪽,
유대인들은 예루살렘을 향해 기도했고 해마다 유월절이면 서로에게 "내년에는 예루살렘에서"라는 말로 인사를 나눴다. 결혼식에서 유리잔을 깨뜨리고 집의 한쪽 모서리는 장식을 하지 않은 채 그냥 놔둠으로써 무너진 성전을 기렸다. ... 가혹한 처벌을 받을 때조차도 유대인들은 계속 예루살렘에서 살았고 출입을 금지하고 죽음으로 처벌하는 경우에만 예루살렘을 비웠다.
- ↑ 다니엘 6:10.
다니엘이 이 조서에 어인이 찍힌 것을 알고도 자기 집에 돌아가서는 그 방의 예루살렘으로 향하여 열린 창에서 전에 행하던 대로 하루 세 번씩 무릎을 꿇고 기도하며 그 하나님께 감사하였더라
- ↑ aliyah. 《Britannica》.
고대에 알리야는 성지에 '올라가는 것'을 의미했다. 오늘날에는 다른 나라에서 이민자들이 이스라엘로 올라가는 것을 알리야라고 부르게 되었다.(In modern times, aliyah has also been used to designate the "going up" to Israel of immigrants from other lands, just as in former times it meant going up to the Holy Land.)
- ↑ "Aliyah". 《The Zionist Century》.
'승천', '올라가는 것'이란 뜻의 '알리야'는 망명이나 디아스포라 상태였던 유대인들이 이스라엘의 땅으로 돌아오는 것을 의미한다. 이스라엘 민족이 애굽에서 올라올 때 사용된 용어이며, 기원전 538년 바벨론 포로에서 해방되었을 때, 바사 왕 고레스가 "너희 중에 무릇 그 백성 된 자는 다 유다 예루살렘으로 올라가서 거기 있는 여호와의 전을 건축하라 너희 하나님이 함께하시기를 원하노라"라고 했던 말이 알리야의 표어가 되었다.(Aliyah, (pl. aliyot) "ascension" or "going up" is the arrival of Jews as individuals or groups, from exile or Diaspora to live in Eretz Yisrael - the Land of Israel. Those who "go up" for this purpose are known as olim - a term used in the Bible when the Children of Israel went up from Egypt (Gen. 50:14 and Num. 32:11) and - at a later period - for the exiles who returned from captivity in Babylon (Ezra 2:1,59 and Neh. 5-6). The call of Cyrus, King of Persia, in 538 B.C.E., - "Whosoever there is among you of all His people, his God be with him, - let him go up." (Ezra 1:3, IIChron. 36:23) - has been used as a watchword for aliyah.)
- ↑ 유시민 (2021.10.29.), 《거꾸로 읽는 세계사》, 30-31쪽,
드레퓌스의 결백을 증명하는 사실이 속속 드러나자 재심 반대파는 폭동을 일으켰다. 그들은 사실이 아니라 믿고 싶은 것을 믿었다. "졸라를 죽여라!" "유대인을 죽이자!" "군대 만세!" 같은 구호를 외치면서 유대인을 폭행하고 유대인 상점을 부쉈으며 졸라의 집에 돌을 던졌다.
- ↑ 레일라 슈넵스, 콜라리 콜메즈 (2020.09.05), 《법정에 선 수학》, 아날로그(글담),
알프레드 드레퓌스는 공개적으로 군적을 박탈당하는 의식을 치러야 했고, 이는 오늘날 프랑스에서 국가적 수치로 기억되는 순간이기도 하다. 그는 계속해서 자신의 무죄를 주장하며 조국에 대한 애정을 피력했지만, 공화국 수비대 장교는 칼을 꺼내 그의 견장과 단추를 잘라내 땅바닥에 집어던졌다. 이 모든 일이 "배신자를 죽여라!", "유대인을 처형하라!"라는 군중의 함성 속에서 진행되었으며 밀려드는 군중으로 인해 광장을 둘러싼 철망이 무너질 지경이었다.
- ↑ 최창모 (2007.9.12.). 이스라엘사. 대한교과서.
그[헤르츨]는 계속하여 오스만 제국에 유대인들의 팔레스타인 이주는 위험하지도, 문제를 일으키지도 않을 것이라는 점을 설명하였고, 오히려 산업이나 충성심에 있어서 유익하다는 점을 강조하였다. 나아가 그는 1902년, 예루살렘에 대학을 설립할 것을 제안하기도 하였으나, 오스만 제국은 오히려 젊은 세대가 고등 교육을 통하여 위험하거나 급진적인 사상 등 '건강하지 못한 정신'을 배우는 것을 더 이상 원치 않았다.)
- ↑ 예레미야 30:3.
나 여호와가 말하노라 내가 내 백성 이스라엘과 유다의 포로를 돌이킬 때가 이르리니 내가 그들을 그 열조에게 준 땅으로 돌아오게 할 것이라 그들이 그것을 차지하리라 여호와의 말이니라
- ↑ 최창모 (2007.9.12.). 이스라엘사. 대한교과서.
헤르츨은 영국 의회가 우간다냐? 팔레스타인이냐? 를 놓고 토의에 부치기도 전에 "우간다는 시온이 아니며, 시온이 될 수 없다."라고 분명히 선언해 버렸으며, "유대 국가의 건설은 팔레스타인만을 목적으로 한다. 선조들의 땅을 향한 염원은 결코 변하지 않고 계속될 것이다."라고 밝혔다.)
- ↑ 최창모 (2007.9.12.). 이스라엘사. 대한교과서.
러시아는 시온주의 운동의 본산지라고 여겨질 만큼 큰 세력을 가지고 있었다. ... 1905년 이후에 시온주의자들 중의 일부는 러시아 정치에 관여하기 시작하였으며, 보다 많은 에너지를 이 운동에 사용하였으나 1905∼1906년의 러시아 혁명으로 시온주의 운동은 큰 억압을 받게 되었다.
- ↑ [책갈피 속의 오늘] 1903년 제정 러시아 反유대인 폭동. 《동아일보》. 2007. 4. 6.
사건은 근거 없는 낭설에서 시작됐다. 2개월 앞서 발생한 러시아 소년 살인 사건이 "유대인의 소행일지 모른다"고 한 신문이 넌지시 암시하자 다른 신문은 이를 받아 "유대인은 유월절에 먹는 무교병(누룩을 넣지 않고 만든 빵)을 만드는 데 기독교도 소년의 피를 이용한다"고 주장했다. 1903년 4월 6일 제정 러시아의 키시네프(오늘날 몰도바의 수도) 도심은 피로 얼룩졌다. 20세기 들어 국가 권력이 주도 또는 방조한 첫 유대인 학살로 기록되는 '키시네프 포그롬(pogrom·반유대인 폭동)'은 이렇게 시작됐다.
- ↑ New Aliyah - Modern Zionist Aliyot (1882 - 1948). 《The Zionist Century》.
- ↑ Zionism. 《Britannica》.
이듬해 시온주의자들은 팔레스타인에 유대 도시와 농촌 정착촌을 건설하며 자치 조직을 세우고 유대 문화 생활과 히브리 교육을 강화했다. 1925년 3월 팔레스타인 내 유대인 인구는 공식적으로 108,000명으로 추산되었으며 1933년에는 약 238,000명(인구의 20%)으로 증가했다.(In the following years the Zionists built up the Jewish urban and rural settlements in Palestine, perfecting autonomous organizations and solidifying Jewish cultural life and Hebrew education. In March 1925 the Jewish population in Palestine was officially estimated at 108,000, and it rose to about 238,000 (20 percent of the population) by 1933.)
- ↑ 최창모 (2007.9.12.). 이스라엘사. 대한교과서.
유대인들의 정착지는 계속 늘어 갔다. 정착촌의 인구는 10년 동안 160,000명으로 늘어났으며, 1929년의 조사에 따르면 110개의 농업 정착촌과 37,000명의 농업 종사자가 활동하였다. 1920∼1929년 사이의 이민자는 약 100,000명에 이르렀다. ... 1930년대에 이르러 이민은 더욱 급증하여 총 인구가 1933년에 250,000명이던 것이 1939년에는 500,000명으로 늘어났으며, 120,000명의 농업 종사자와 68개의 키부츠, 71개의 모샤브가 자리잡았다.)
- ↑ Zionism. 《Britannica》.
아랍계 주민들은 팔레스타인이 결국 유대인의 나라가 될 것을 두려워했고 시온주의와 이를 지지하는 영국 정책에 거세게 저항했다. ... 영국은 아랍인들과 유대인 사이의 평화를 유지하기 유지하기 위해 1939년부터 유대인 이민을 제한했다.(the Arab population feared that Palestine would eventually become a Jewish state and bitterly resisted Zionism and the British policy supporting it. British forces struggled to maintain order in the face of a series of Arab uprisings. ... ultimately led Britain to reassess its policies. In hopes of keeping the peace between Jews and Palestinian Arabs ... Britain placed restrictions on Jewish immigration in 1939.)
- ↑ 출애굽기 5:9-14.
그 사람들의 고역을 무겁게 함으로 수고롭게 하여 그들로 거짓말을 듣지 않게 하라 간역자들과 패장들이 나가서 백성에게 일러 가로되 바로의 말씀에 내가 너희에게 짚을 주지 아니하리니 너희는 짚을 얻을 곳으로 가서 주우라 너희 일은 조금도 감하지 아니하리라 하셨느니라 백성이 애굽 온땅에 흩어져 곡초 그루터기를 거두어다가 짚을 대신하니 간역자들이 그들을 독촉하여 가로되 너희는 짚이 있을 때와 같이 당일 일을 당일에 마치라 하며 바로의 간역자들이 자기들의 세운 바 이스라엘 자손의 패장들을 때리며 가로되 너희가 어찌하여 어제와 오늘에 만드는 벽돌의 수효를 전과 같이 채우지 아니하였느냐 하니라
- ↑ 최창모 (2007.9.12.). 이스라엘사. 대한교과서.
1935년 6월에 독일 의학 협회에서는 의학 잡지에 "유대인과 결핵균에 관한 연구" 결과를 발표하면서, 유대인을 숨겨 주는 모든 이들에게 결핵 감염의 위험성을 경고하기도 하였다. 독일인에게 있어서 유대인은 박멸되어야 할 열등한 종자나 '해충' 또는 세균과 같은 것이어서 근절되지 않으면 조직을 파괴하고 독을 퍼뜨리는 생물체로 취급되었다.
- ↑ 최창모 (2007. 9. 12.). 이스라엘사.
나치는 보다 조직적인 유대인 억압 정책을 펴 나갔다. 1939년 10월 말부터 독일 점령지 폴란드 내의 모든 유대인들에게는 노란 바탕의 다윗의 별 배지를 달도록 하는 법령이 시행되었으며, 그 해 12월에는 14세부터 60세까지의 모든 유대인 남자는 2년 동안의 강제 노동을 위해 입영되었다. 1939년 11월과 12월에 모든 유대인들은 도시의 특정 구역인 게토(Ghetto)로 이주하라는 명령이 하달되었다. ... 게토 밖에서 발견되는 유대인은 모두 사형에 처해졌다.
- ↑ 홀로코스트 기념관에서 본 이스라엘. 《동아일보》.
150만 명의 어린이가 못다 핀 채 죽어갔습니다. 8년 동안 매일 학교 1개씩을 통째로 없애버린 거나 마찬가지입니다. 제 어머니와 여동생 에리카도 그날 (수용소 도착) 이후 다시는 만날 수 없었습니다
- ↑ 홀로코스트 기간 중의 어린이들. 《홀로코스트 백과사전》.
나치는 그들의 이데올로기에 입각하여 "원치 않는" 또는 "위험한" 그룹의 어린이들을 죽이는 것을 "인종적 투쟁"의 일부로 또는 공공 안전의 예방적 조치로 옹호하여 왔다. 독일과 그 협력자들은 그들의 이데올로기와 빨치산이나 빨치산의 혐의가 있는 자들의 공격에 대한 보복을 이유로 어린이들을 학살하였다. ... 백만 명 이상의 유태인 어린이와 수만 명의 로마니(Romani, 집시) 어린이, 수용 시설에 살고 있는 신체적 장애와 정신 장애가 있는 독일 어린이, 폴란드 어린이, 그리고 소련 점령지에 살고 있는 아이들을 포함하여 약 150만 명의 어린이들을 학살하였다.
- ↑ 가스실 학살. 《홀로코스트 백과사전》.
나치는 1939년 말, 화학적으로 제조된 순수 일산화탄소 가스를 사용하여 정신 질환자("안락사")를 학살함으로써 대량 학살을 위한 독가스 실험을 시작하였다. ... 1941년, 유태인들을 (가스실로 보내기 위해) 집단 학살 수용소로 이송하는 것이 "최종 해결"을 성취하는 가장 효과적인 방법이라고 결론지었다. ... 수용소로의 이송이 절정에 달할 때에는 하루 최고 6,000명의 유태인이 폴란드 아우슈비츠 수용소에서 가스로 질식사하였다.
- ↑ 창세기 32:22-31.
야곱은 홀로 남았더니 어떤 사람이 날이 새도록 야곱과 씨름하다가 그 사람이 자기가 야곱을 이기지 못함을 보고 야곱의 환도뼈를 치매 야곱의 환도뼈가 그 사람과 씨름할 때에 위골되었더라 그 사람이 가로되 날이 새려하니 나로 가게 하라 야곱이 가로되 당신이 내게 축복하지 아니하면 가게 하지 아니하겠나이다 ... 네 이름을 다시는 야곱이라 부를 것이 아니요 이스라엘이라 부를 것이니 이는 네가 하나님과 사람으로 더불어 겨루어 이기었음이니라 ... 내가 하나님과 대면하여 보았으나 내 생명이 보전되었다 함이더라 그가 브니엘을 지날 때에 해가 돋았고 그 환도뼈로 인하여 절었더라
- ↑ 최창모 (2007.9.12.). 이스라엘사.
대학살의 생존자들은 이민의 문이 열리도록 계속적인 압력을 가하였다. 수용소를 나온 일부 유대인들은 서유럽으로 이주하여 정착하기도 하였으나, 대다수의 사람들은 팔레스타인으로 이주하기를 희망하였다.
- ↑ Zionism. 《Britannica》.
나치에 의한 대대적인 유럽 유대인 말살 정책으로 인해 수많은 유대인들은 팔레스타인을 도피처로 삼게 되었으며, 그 외 많은 지역의 유대인들, 특히 미국에 살고 있던 유대인들도 시온주의를 받아들이기 시작했다.(The large-scale extermination of European Jews by the Nazis led many Jews to seek refuge in Palestine and many others, especially in the United States, to embrace Zionism.)
- ↑ Zionism. 《Britannica》.
아랍인과 시온주의자들 사이에 긴장이 고조됨에 따라 영국은 팔레스타인 문제를 영·미 회의와 UN에 차례로 제출했다. 1947년 11월 29일에 열린 UN 회의에서 영국은 팔레스타인을 아랍인들과 유대인의 나라로 나누고 예루살렘을 국제화할 것을 제안했다.(As tensions grew among Arabs and Zionists, Britain submitted the Palestine problem first to Anglo-U.S. discussion for a solution and later to the United Nations, which on November 29, 1947, proposed partition of the country into separate Arab and Jewish states and the internationalization of Jerusalem.)
- ↑ 최창모 (2007. 9. 12). 이스라엘사.
1948년 5월 14일(금) 오후 4시, 텔아비브 박물관에서는 '하티크바〔Hatiqva, '희망'이라는 제목의 국가(國歌)〕'가 불려진 후, 벤 구리온이 독립 헌장이 기록된 두루마리를 읽고 있었다. "우리는 유대인의 역사적이며 본질적인 권리와 유엔 안전 보장 이사회의 결정에 따라 이스라엘이라 불리는 국가를 팔레스타인에 세울 것을 선언한다."
- ↑ “전 세계 유태인 유월절 맞이”, 《국제신보》, 1964.3.30.,
전 세계의 천백만 유태인들에게 3월 27일 밤은 특수한 밤이다. 이날 이들은 3천 2백 년 전에 유태인들이 하나님의 은혜로 애굽의 질곡에서 벗어난 고사를 기념하기 위한 유월절의 시작을 고하는 날이기 때문이다.
- ↑ 이사야 56:5.
내가 내 집에서, 내 성안에서 자녀보다 나은 기념물과 이름을 주며 영영한 이름을 주어 끊치지 않게 할 것이며
- ↑ Zionism. 《Britannica》.
이스라엘은 안팎에서 테러 행위에 관여하고 있는 적대적인 아랍 국가와 팔레스타인 '해방' 기구에 둘러싸인 무장 병영이 되고 말았다.(but at the same time, it became an armed camp surrounded by hostile Arab nations, and Palestinian organizations engaged in terrorism in and outside Israel.)
- ↑ 최창모 (2007. 9. 12.). 이스라엘사.
1968년, 예루살렘에서 열린 제27차 시온주의 총회에서는 시온주의의 프로그램으로 다음과 같은 5개 항을 결의하였다. (1) 유대 민족을 통합하고, 이스라엘을 유대인의 삶의 중심으로 삼는다. (2) 흩어진 모든 나라로부터 유대인을 역사적인 조국으로 불러 모은다. (3) 유대국가를 예언자들의 최고의 가치였던 정의와 평화 위에 굳게 세워 나간다. (4) 모든 유대인에게 히브리어, 유대 문화, 유대 정신을 교육시킴으로써, 유대 민족의 자기 동일성과 특성을 보존해 나간다. (5) 유대인의 권리를 보호한다.
- ↑ Zionism. 《Britannica》.
대부분의 유대인들은, 이스라엘 밖에 있는 유대인은 '포로지'에서 사는 것이며 이스라엘에서만 유대인이 온전히 살 수 있다는 정통과 견해를 받아들이지 않고 있다.(however, reject the view propagated by some very Orthodox Jews in Israel that the Jews outside Israel were living in “exile” and could live a full life only in Israel.)
- ↑ 시편 133:1-3.
형제가 연합하여 동거함이 어찌 그리 선하고 아름다운고 머리에 있는 보배로운 기름이 수염 곧 아론의 수염에 흘러서 그 옷깃까지 내림 같고 헐몬의 이슬이 시온의 산들에 내림 같도다 거기서 여호와께서 복을 명하셨나니 곧 영생이로다
- ↑ 히브리서 12:22-24.
그러나 너희가 이른 곳은 시온산과 살아계신 하나님의 도성인 하늘의 예루살렘과 천만 천사와 하늘에 기록한 장자들의 총회와 교회와 만민의 심판자이신 하나님과 및 온전케 된 의인의 영들과 새 언약의 중보이신 예수와 및 아벨의 피보다 더 낫게 말하는 뿌린 피니라
- ↑ 로마서 15:4.
무엇이든지 전에 기록한 바는 우리의 교훈을 위하여 기록된 것이니
- ↑ 전도서 1:9-10.
이미 있던 것이 후에 다시 있겠고 이미 한 일을 후에 다시 할지라 해 아래는 새 것이 없나니 무엇을 가리켜 이르기를 보라 이것이 새 것이라 할 것이 있으랴 우리 오래 전 세대에도 이미 있었느니라
- ↑ 이사야 33:20-24.
우리의 절기 지키는 시온성을 보라 ... 여호와는 우리의 왕이시니 우리를 구원하실 것임이니라 ... 그 거민은 내가 병들었노라 하지 아니할 것이라 거기 거하는 백성이 사죄함을 받으리라
- ↑ 데살로니가후서 2:3-7.
누가 아무렇게 하여도 너희가 미혹하지 말라 ... 내가 너희와 함께 있을 때에 이 일을 너희에게 말한 것을 기억하지 못하느냐 저로 하여금 저의 때에 나타나게 하려 하여 막는 것을 지금도 너희가 아나니 불법의 비밀이 이미 활동하였으나 지금 막는 자가 있어 그중에서 옮길 때까지 하리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