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리우스주의
아리우스주의(영어: Arianism, 그리스어: Ἀρειανισμός , Areianismós)는 4세기 초 이집트 알렉산드리아의 장로 아리우스(라틴어: Arius, 그리스어: Άρειος, 250?–336)가 주창한 기독교 신학이다. 아리우스주의는 그리스도가 피조물이며 완전한 신(神)도, 완전한 사람도 아닌 제2의 신(Secondary God)이라고 주장하는 사상으로 초기 기독교의 주요 이단으로 비난받았다.
325년에 개최된 제1차 니케아 공의회는 아리우스파를 단죄하는 '니케아 신조(Nicaea信條)'를 선포해 아리우스주의를 이단으로 배격했다. 그러나 이것은 긴 논쟁의 시작이었을 뿐 아리우스주의 논쟁은 381년 제1차 콘스탄티노폴리스(콘스탄티노플) 공의회에서 종지부를 찍었다.
아리우스
아리우스주의의 시작
아리우스주의는 알렉산드리아 교회의 장로 아리우스의 주장에서 나왔다. 아리우스는 뛰어난 언변으로 인기가 높았다.[1] 그가 성부와 성자가 동등한 하나님이라는 사실을 반대하고 '성부와 성자가 다르다'고 주장하자 알렉산드리아 교회 감독 알렉산더는 아리우스를 출교시켰다. 알렉산드리아에서 추방된 아리우스는 동방 각지를 다니며 감독 몇 명을 설득해 자신을 지지하게 했고, 외우기 쉬운 시 형식에 자신의 이론을 넣어 대중에게 퍼뜨렸다.[2]
아리우스는 325년 로마 황제 콘스탄티누스 1세가 소집한 니케아 공의회에서 이단자로 규정되어 파문당했다. 하지만 곧 영향력을 가진 황제의 이복동생 콘스탄티아의 지지로 추방 상태에서 돌아왔고, 다시 교회에 입교했다. 그는 336년 콘스탄티노폴리스 거리를 걷다가 탈장으로 죽었다.[3]
그리스도의 신성 부인
아리우스주의는 예수 그리스도가 신(神) 즉 하나님이 아니라 하나님이 창조한 피조물이라는 사상이다. 아리우스는 '스스로 존재하며 불변하는 하나님의 유일성'을 전제로 내세웠다. 반면 성자는 스스로 존재할 수 없는 '시작'이 있는 피조물이며, 성장하고 변화하고 영원하지 않으므로 하나님일 수 없다고 주장했다. 이는 성부와 성자가 동일한 하나님이라는 성경의 가르침에 어긋난 이단 사상이다.
아리우스의 주장을 정리하면 다음과 같다.
- 그리스도는 몸을 입은 로고스(헬라어: λóγoς, 말씀)다.[4]
- 그리스도는 변하고 고난을 받을 수 있다.
- 그러므로 로고스는 변할 수 있고 하나님과 동등하지 않다.
아리우스주의 논쟁의 역사
니케아 공의회: 아리우스주의 이단 규정
325년, 로마 황제 콘스탄티누스 1세는 아리우스주의 논쟁을 해결하기 위해 니케아 공의회를 열었다. 아리우스주의를 반박한 사람들 중 가장 열성적이었던 알렉산드리아 교회의 아타나시우스[5]는 '아리우스주의는 성자를 반신(半神)으로 전락시켰고, 하나님인 성자만이 사람과 하나님을 화해시킬 수 있다는 기독교의 구속 개념을 훼손했다'고 논박했다.
니케아 공의회는 니케아 신조(신경)를 공포했다. 니케아 신조는 '성자는 성부와 동일한 본질(호모우시오스[ὁμοούσιος, homoousios])', 즉 '성자가 성부와 다르지 않은 하나님'이라는 내용이었다. 이로써 아리우스주의는 이단으로 정죄되고, 아리우스와 그의 추종자들은 파문되어 추방당했다.[6]
아리우스주의와 로마 황제
아리우스를 받아들인 콘스탄티누스
니케아 공의회 후 3년이 지나지 않아 콘스탄티누스 1세는 아리우스의 추방령을 취소했다.[7] 아리우스는 죄 없이 탄압받던 사람처럼 대우받았고, 그와 함께 출교되었던 감독들도 교회로 돌아왔다. 이들은 자신을 반대했던 사람들을 부도덕한 사람이라고 비난하거나 콘스탄티누스의 어머니 헬레나의 명예를 훼손했다고 고발했다.[8] 알렉산드리아 교회의 감독이던 아타나시우스도 공격을 피하지 못했다. 아타나시우스는 이집트에서 로마로 공급되는 곡물 유통을 방해하겠다고 위협한 죄로 고소당해 유배를 떠났다.[9]
아리우스주의는 335년 공의회의 승인을 받았다. 336년 아리우스가 죽은 뒤에도 아리우스의 추종자들은 아리우스주의를 공론화하며 세력을 넓혀갔다. 이듬해 337년에는 콘스탄티누스 1세가 죽었다. 그는 죽기 직전 아리우스파 주교 유세비우스(에우세비오스)에게 세례를 받았다.[10]
아리우스주의를 지지한 콘스탄티우스
콘스탄티누스 1세 사후 로마제국은 그의 세 아들이 삼분(三分) 통치했다. 콘스탄티누스 2세(라틴어: Flavius Claudius Constantinus, 재위: 337–340)는 서방, 콘스탄스(라틴어: Flavius Julius Constans, 재위: 337–350)는 중부, 콘스탄티우스 2세(재위: Flavius Julius Constantius, 재위: 337–361)는 동방 지역을 다스렸다. 콘스탄티누스 2세와 콘스탄스는 니케아 신조를 지지했지만, 콘스탄티우스는 달랐다. 그의 통치 지역은 아리우스주의의 영향력이 큰 동방이었고, 그 역시 아리우스주의를 옹호했다. 동로마의 수도 콘스탄티노폴리스의 대주교 자리에는 아리우스파인 에우세비오스가 앉았다. 동방 교회와 서방 교회는 대립 관계가 되었다.[11]
340년 콘스탄티누스 2세가 죽자 서방은 콘스탄스의 지배를 받았다. 10년 후 콘스탄스도 암살되었다. 동방을 다스리던 콘스탄티우스는 전쟁에 휘말린 로마제국을 평정하고 단독 통치했다. 콘스탄티우스는 친아리우스주의 정책을 펼쳤다. 모든 교회 감독들에게 '성자는 성부를 닮지 않았다'는 아리우스주의를 받아들이도록 강요했으며, 따르지 않는 감독은 추방했다. 아리우스주의에 반대한 아타나시우스도 콘스탄티우스의 박해에 피신했다.[12] 로마 감독 리베리우스는 콘스탄티우스의 강압에 니케아 신조를 무효화하는 문서에 서명하기도 했다.[13]
배교자 율리아누스
360년, 파리에 주둔했던 로마 군대가 콘스탄티우스 2세에게 반란을 일으키고 그들의 지도자 율리아누스(라틴어: Flavius Claudius Julianus, 재위: 361–363)를 황제로 선포했다. 그런데 콘스탄티우스와 율리아누스의 군대가 충돌하기 전, 콘스탄티우스가 병에 걸려 죽으면서 361년 율리아누스가 로마제국의 단독 황제가 되었다. 그는 즉위하자마자 이교로 개종을 선언하고 스스로를 명백하게 이교의 수장으로 여김으로 '배교자 율리아누스'라는 별명을 얻었다.[14]
율리아누스는 콘스탄티누스의 조카로, 어릴 적 그리스에서 공부하며 신플라톤주의에 이끌렸고 '불멸의 태양신' 숭배를 받아들였다. 이러한 율리아누스는 모든 종교에 대해 신앙의 자유를 선포했는데, 이 칙령은 이교를 부활시키고 공식 종교의 수준으로 끌어올리려는 의도가 숨어 있었다. 그는 이교도의 신을 위한 동물 희생제를 지냈고 이교 정통 교리를 옹호했으며 자기 휘하의 성직자들에게 교리에 관한 지시를 내렸다. 또한 콘스탄티우스 2세가 추방했던 니케아 신앙의 교회 감독들을 복귀시켰다. 이는 아리우스주의 교회 감독과 니케아 신앙 교회 감독 간의 불화를 조장하기 위한 조치였다.[15]
열렬한 아리우스주의자 발렌스
율리아누스가 즉위 2년 만에 죽고, 그 뒤를 이은 요비아누스(라틴어: Flavius Claudius Jovianus, 재위: 363–364)도 급사하자 서방은 신앙 면에서 중립적인 정치를 펼친 발렌티니아누스 1세(라틴어: Flavius Valentinianus, 재위: 364–375)가, 동방은 열렬한 아리우스주의자 발렌스(Valens, 재위: 364-378)가 통치했다. 당연히 동방에서는 아리우스주의가 강성했다. 발렌스는 니케아 신앙을 박해했고 니케아 신조를 따르는 감독들을 유배 보냈다.
콘스탄티노폴리스 공의회: 아리우스주의 금지
378년 발렌스가 전사했다. 동로마는 서로마 황제 그라티아누스(라틴어: Flavius Gratianus, 재위: 375–383)의 통치 아래 놓였다. 그라티아누스는 발렌스의 박해로 유배된 동로마 감독들을 복직시켰고, 군대 총사령관 테오도시우스 1세(라틴어: Flavius Theodosius, 재위: 379–395)를 동로마의 후계자로 삼았다.
테오도시우스는 니케아 신앙을 따르는 독실한 기독교인이었다. 그는 380년 모든 신민이 삼위일체를 인정하는 신조 하나만 따르게 하는 칙령을 발표하여 삼위일체를 믿는 사람만 '가톨릭(Catholic, 어원은 헬라어: καθολικός[katholikós][16]로 '보편'을 의미)' 신자로 간주했다. 380년에 결정된 신조는 다시 구체적으로 규정되어 381년 테오도시우스가 소집한 제1차 콘스탄티노폴리스 공의회에서 정식 승인을 받았다. 그 신조가 '니케아–콘스탄노폴리스 신경(Niceno-Constantinopolitan Creed)'이다. '니케아–콘스탄티노폴리스 신경'은 일반적으로 '니케아 신경' 또는 '니케아 신조'라고 하며, 성령의 신성이 결여됐던 325년 니케아 신조를 개정했다. 테오도시우스는 391년 이교의 희생제사와 신전참배를 금지했고, 392년에는 지난해의 칙령을 더욱 엄격하게 시행하여 이교 신들의 숭배의식을 모두 금지시켰다.[17]
- 325년 니케아 신조와 381년 니케아–콘스탄티노폴리스 신조(신경)
325년 니케아 신조 [18] | 381년 니케아–콘스탄티노폴리스 신조 (한국천주교중앙협의회)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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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한 분이신 하느님을 믿는다. ["그분이 존재하지 않은 시대가 있었다.", |
한 분이신 하느님을 저는 믿나이다. |
게르만족의 아리우스주의
아리우스주의를 전파한 울필라스
아리우스주의는 제1차 콘스탄티노폴리스 공의회 이후 로마제국 안에서 사라졌지만, 게르만족 사이에는 계속 존속했다.[19] 게르만족은 원래 발트해 연안과 스칸디나비아반도에 살면서 농경, 목축과 수렵 생활을 했는데, 인구 증가와 토지 부족으로 남하하여 로마의 국경선 근처에 자리잡았다. 4세기 후반 흑해 연안의 게르만족은 훈족의 서진(西進)으로 압박을 받아 로마 제국 영토 안으로 이동하였고, 이를 계기로 게르만족의 대이동이 시작됐다.[20][21] 이 과정에서 고트족(동고트족, 서고트족), 반달족, 앵글로색슨족, 롬바르드족, 프랑크족, 알라만족, 부르군트족, 수에비족, 헤룰리족 등이 로마 영토 안에 여러 왕국을 건설했다. 이 때문에 서로마제국은 점차 쇠퇴하다가 476년, 게르만족 용병대장 오도아케르에게 멸망당했다.[22]
게르만족의 포로가 된 기독교 지도자들은 그들에게 포교했고 또는 포교를 위해 자원해서 그들에게 갔다. 아리우스파 역시 아리우스주의를 전파했다. 게르만족의 아리우스주의는 4세기 중엽 고트족에서 시작됐다. 당시 아리우스주의를 지지하는 콘스탄티우스 2세의 치세 아래 아리우스파인 서고트족 주교 울필라스의 활동으로 거의 모든 고트족이 아리우스주의 기독교인이 되었다.[23] 프랑크족을 제외하고는 대부분의 게르만족이 로마 가톨릭에서 이단으로 규정한 아리우스주의를 받아들여 로마 가톨릭을 믿던 로마인과 융화하기가 어려웠다.[24]
로마 가톨릭으로 개종한 프랑크족
서로마를 차지한 게르만족 사이에 아리우스주의가 활개 칠 때, 프랑크족은 게르만족의 전통 종교를 신봉했다. 프랑크족이 로마 가톨릭으로 개종한 것은 클로비스 1세(라틴어: Chlodovechus I, 재위: 481–511) 때였다. 496년경에 벌어진 알라만족과의 전쟁(톨비아크[Tolbiac, Tolbiacum] 전투)에서 승리한 이후 클로비스가 로마 가톨릭을 받아들이고 세례를 받은 것으로 알려져 있다.[25]
클로비스의 개종 후, 프랑크족이 로마 가톨릭 신앙을 대대적으로 받아들이자 단일 민족으로의 통합이 수월해졌다. 또한 아리우스주의를 신봉한 다른 게르만족들과 달리 프랑크족은 로마 가톨릭 성직자들과 갈리아에 잔존한 로마인들의 지원을 얻었다. 롬바르드족의 침입에 시달리던 교황청을 도와줌으로써 로마 교회와 우호적인 관계를 형성하고, 카롤루스 왕조 개창을 지지한 로마 교회에 대한 보답으로 이탈리아 중부 지역을 롬바르드족에게서 빼앗아 교황에게 기증하여 교황령을 마련하는 데 발판을 만들어 주었다.[26] 이로써 프랑크왕국은 서유럽에 가장 강력한 기독교 국가를 건립했고, 8세기 초에는 비잔틴(동로마)제국을 제치고 유럽의 최강국이 되었다.[27]
아리우스주의 국가 멸망
서방의 가톨릭 교회가 아리우스주의를 믿는 게르만족의 지배를 받는 불편한 상황에 놓여 있을 때, 가톨릭교를 신봉하는 동로마 제국에서 527년 유스티니아누스 1세(라틴어: Flavius Petrus Sabbatius Justinianus, 재위: 527–565)가 황제로 즉위했다. 유스티니아누스는 동로마와 서로마를 합치려는 야망을 가지고 있었고, 즉위 전부터 분열된 동방 교회와 서방 교회의 통일이 곧 하나의 로마제국으로 재통일되는 길이라 믿었다. 그래서 519년 로마 교황의 사절단이 콘스탄티노폴리스를 방문했을 때 당시 황제 유스티누스 1세(라틴어: Flavius Justinus, 재위: 518–527)의 조카이자 내무대신이었던 유스티니아누스는 로마 가톨릭이 이단으로 지목한 동로마 제국의 감독들을 파문하는 데 동의했다.[28] 이후 황제가 되어 로마 교황을 교회의 우두머리라고 공식 선언하고, 로마 가톨릭이 아닌 이단 아리우스주의와 이교를 숙청했다.[29] 534년에는 아프리카의 가톨릭 교회를 박해한 반달족을 무너뜨리고 로마 가톨릭 교회를 부활시켰으며,[30] 535년에는 동고트족에 전쟁을 선포했다.[31] 538년 로마에서 패퇴한 동고트는 다시는 승기를 잡지 못하고 멸망의 길로 접어들었다. 이처럼 아리우스주의를 신봉하던 반달족과 동고트족이 무너지자 다른 게르만족은 아리우스주의를 포기하고 로마 가톨릭 신앙으로 바꾸었다.[32]
현대의 아리우스주의
역사 속으로 사라진 아리우스주의 기독교처럼 성부와 성자가 동등하지 않다는 주장은 후대에도 나타났다. 유니테리언파 기독교는 한 분 하나님만 계신다고 믿으며 삼위일체 교리나 그리스도의 신성을 부정한다. 19세기에 등장한 '여호와의 증인'은 예수님이 최초의 피조물이며 영원하지 않다고 주장한다. 이들도 일종의 아리우스주의라고 할 수 있다.[33]
같이 보기
외부 링크
- 하나님의교회 세계복음선교협회 홈페이지
- "성경 속 성삼위일체 하나님 - 성부·성자·성령은 누구인가?". 《그리스도 안상홍님 웹사이트》
각주
- ↑ "아리우스", 《종교학대사전》, 한국사전연구사,
그리스도론에 관한 이단 아리우스주의의 주창자. 그리스명 아레이오스(Areios). 안티오키아의 루키아노스의 제자로, 알렉산드리아에서 성직에 임했는데 금욕주의적 태도와 설교의 능숙함으로 인기를 얻었다.
- ↑ 필립 샤프, 《교회사 3. 니케아 공의회와 이후의 기독교》, 이길상 역, 크리스챤다이제스트, 2004, 551쪽.
아리우스와 그의 추종자들이 그리스도의 참된 신성을 부정한 죄로 321년에 알렉산드리아에서 백 명의 이집트와 리비아 주교들이 모인 공의회에서 면직과 출교를 당했다. 이러한 조치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아리우스는 수많은 추종자들을 데리고 계속해서 종교 집회를 가졌으며, 알렉산드리아에서 추방된 뒤에는 팔레스타인과 니코메디아로 가서 자신의 교리를 퍼뜨렸고, 그 사상을 절반은 시로, 절반은 산문으로 된 재미있는 책으로 엮어 보급했다.
- ↑ Philip Schaff, "Chapter XXXVIII. The Death of Arius," Nicene and Post-Nicene Fathers, Series II, Volume 2, Christian Classics Ethereal Library
- ↑ 요한복음 1:1–14.
태초에 말씀이 계시니라 이 말씀이 하나님과 함께 계셨으니 이 말씀은 곧 하나님이시니라 ... 말씀이 육신이 되어 우리 가운데 거하시매 우리가 그 영광을 보니 아버지의 독생자의 영광이요 은혜와 진리가 충만하더라
- ↑ 니케아 공의회 당시에는 부제였으나 후에 알렉산더의 뒤를 이어 알렉산드리아 교회의 감독이 됨
- ↑ 김경현, 《콘스탄티누스 황제와 기독교》, 세창출판사, 2017, 226쪽.
그리하여 정통 신조의 초안을 만들어 투표에 붙인 결과 반대는 17명에 불과했다. 그들마저 대타협을 학수고대하던 콘스탄티누스 황제가 추방형으로 으름장을 놓자 대부분 입장을 철회했다. 끝까지 반대를 고집한 것은 아리우스 자신과 아프리카에서 온 2명의 주교들뿐이었다. 니카이아 회의는 그들을 파문하고 아리우스의 책을 불태웠다.
- ↑ 남성현, 《콘스탄티누스 가문의 기독교적 입법정책》, 한국학술정보, 2013, 25쪽,
적당한 시간이 흐른 후, 325년에 축출된 바 있는 아리우스파를 다시 받아들임으로써 위대한 화해의 작업을 마무리하려는 것이 바로 콘스탄티누스의 바람이었다. 대회(synod)나 혹은 대회의 위원회가 327년에 재소집된 것으로 추측되는데, 이 회의에서 아리우스파가 정통이라고 하는 것을 모호하게 인정하는 일이 있었다. 그리고 나서 그가 교회와 화해하였다고 결정하였다. 황제는 추방의 명령을 거두어들였다.
- ↑ 레오 도널드 데이비스, 《초기 그리스도교 에큐메니컬 7대 공의회》, 이기영 역, 대한기독교서회, 2018, 111-114쪽.
327년경 콘스탄티누스 황제는 공의회의 공과에 관해 다시 한 번 생각을 가다듬게 되었다. 그는 제국 수도 니코베디아의 주교이자 아리우스주의자인 에우세비우스의 영향을 받았다. ... 아리우스파 지도자들이 황명에 따라 사면을 받게 되었고, ... 한편 니코메디아의 에우세비우스는 니케아파 주교들을 제거하려는 전략을 폈다.
- ↑ 이냐시오 오르티츠 데 우르비나, 《니케아·콘스탄티노폴리스 공의회》, 황치헌 역, 수원가톨릭대학교출판부, 2018, 173-177쪽
- ↑ 에드워드 기번, 《로마제국 쇠망사》 2권, 송은주 역, 민음사, 2010, 222-223쪽.
니케아 공의회가 있은 지 3년이 지나기도 전에 이 금지된 종파에게 자비와 관용을 베풀었다. ... 그[콘스탄티누스]는 임종시 니코메디아의 아리우스파 주교[에우세비우스]로부터 세례를 받았다. ... 그는 아리우스를 비호하고 아타나시우스를 박해하면서도 여전히 니케아 공의회를 그리스도교 신앙의 보루이자 자신의 치적으로 여겼다.
- ↑ 필립 샤프, 《교회사 3. 니케아 시대와 이후의 기독교》, 이길상 역, 크리스챤다이제스트, 2004, 560-565쪽.
동방에서는 아리우스주의가 우세했다. 콘스탄티누스 대제의 둘째 아들로서 동방의 군주였던 콘스탄티우스(Constantius)는 자신의 조정 신료들과 함께 철저한 불관용의 태도로 아리우스주의를 신봉했다. 니코메디아의 에우세비우스는 콘스탄티노플 주교가 되었다(338). ... 서방 교회 전체는 보편적으로 니케아 정통신앙에 확고히 속해 있었고 ... 이렇게 해서 동방과 서방이 명백한 대립의 관계에 들어가게 되었다.
- ↑ "Constantius II," Encyclopaedia Britannica
- ↑ "Liberius," Encyclopaedia Britannica
- ↑ 김흥식, "율리아누스", 《세상의 모든 지식》, 서해문집, 2007
- ↑ 수잔 와이즈 바우어, 《수잔 바우어의 중세 이야기 1》, 이광일 역, 이론과실천, 2011, 61쪽.
율리아누스는 니케아 공의회에서 아리우스에 동조했다는 이유로 추방당한 기독교 성직자 전원을 복직시켰다. ... 당연히 곧바로 심각한 신학 논쟁이 벌어졌다. ... 율리아누스는 통합이 아니라 분열을 위해서 기독교의 힘을 이용했다. 이 모든 반기독교 책동 때문에 율리아누스는 '배교자 율리아누스'라는 별명을 얻었다.
- ↑ “καθολικός”, 《네이버 고대 그리스어사전》
- ↑ "정의가 없는 국가는 강도떼와 같다", 《한겨레》, 2019. 10. 20.,
그리스도교는 밀라노 칙령(313년)을 통해 신앙의 자유를 얻은 뒤 급속히 성장하여, 392년에는 로마 제국의 국교가 되었다. 테오도시우스 황제는 그리스도교를 국교로 선포하면서 전통적인 다신교의 신전들을 폐쇄하고 제사를 금하는 일련의 칙령을 반포했다.
- ↑ 후베르투스 R. 드롭너, 《교부학》, 하성수 역, 분도출판사, 2001, 345-346쪽
- ↑ 수잔 와이즈 바우어, 《수잔 바우어의 중세 이야기 1》, 이광일 역, 이론과실천, 2011, 133쪽,
아리우스주의(그리스도는 영원부터 성부와 공존한 것이 아니라 성부에 의해 창조됐다는 설)는 여전히 살아 있었다. 그러나 제국의 중심에서 변방으로 밀려난 상태였다. 아리우스파는 야만족들의 종교가 됐다.
- ↑ 김형종 외, 《고등학교 세계사》, 금성출판사, 2017, 116쪽
- ↑ 김덕수 외, 《고등학교 세계사》, 천재교육, 2017, 125쪽
- ↑ 조한욱 외, 《고등학교 세계사》, 비상교육, 2016, 105쪽
- ↑ "Goth," Encyclopaedia Britannica
- ↑ 강택구 외, 《고등학교 세계사》, 더텍스트, 2015, 85쪽
- ↑ 프랑크족과 알라만족 사이에 벌어진 톨비아크 전투 날짜는 전통적으로 496년으로 알려져 있지만, 다른 기록에서는 480년대나 490년대 초, 또는 그 이후인 506년경이라고 추정하기도 한다. 클로비스가 세례를 받은 연도는 톨비아크 전쟁 승리 이후이다(Heidi Heiks, 《AD 508 Source Book》, Vol. 1, TEACH Services, Inc., 2011 참고).
- ↑ 김덕수 외, 《고등학교 세계사》, 천재교육, 2017, 126쪽
- ↑ "프랑크 왕국", 《두산백과 두피디아》
- ↑ 존 줄리어스 노리치, 《비잔티움 연대기 1: 창건과 혼란》, 남경태 역, 바다출판사, 2016, 311-313쪽.
519년 3월 25일에는 교황의 사절단이 콘스탄티노플에 와서 열째 초석에서 유스티니아누스의 영접을 받았다. 이틀 뒤 소피아 대성당에서 요한네스 총대주교는 옛 로마와 새 로마의 교회가 나눌 수 없는 하나라고 선언하고, ... 모든 이단 종파에 대한 파문장을 엄숙하게 낭독했다.
- ↑ 레오 도널드 데이비스, 《초기 그리스도교 에큐메니컬 7대 공의회》, 이기영 역, 대한기독교서회, 2018, 331-332쪽.
유스티니아누스 1세는 전임자들보다 더 강력하고 조직적으로 교회 관련 사안에 개입하기 시작했다. ... "공의회의 결의에 따라 지존하신 옛 로마의 교황은 모든 성직자 중 최선임자요, 새로운 로마의 수도인 콘스탄티노플의 총대주교는 로마 교황청의 교황 바로 다음의 위상을 지니며, 기타의 다른 모든 교구에 우선하는 위치에 있다."라고 선언했다. ... 그는 동로마 지역에 상당수 남아 있는 이교들을 숙청하는 일에 정열을 기울였다.
- ↑ "Vandal," Encyclopaedia Britannica
- ↑ "Ostrogoth," Encyclopaedia Britannica
- ↑ James Hastings et al., "ARIANISM," Encyclopedia of Religion and Ethics, Vol. 1, Charles Scribner's Sons, 1908, p. 783, "Every barbarian kingdom ultimately abandoned Arianism, or else as in the case of the Ostrogoths in Italy and the Vandals in Africa, Arianism proved one of the causes of national ruin. . . . and each in turn, after a severe struggle, abandoned the form of Christianity in which they had been instructed for the Niceno-Roman faith."
- ↑ "Arianism," Encyclopaedia Britannica