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마의 기독교 박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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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마의 기독교 박해는 200년 넘게 이어졌다.
제롬(Jean-Léon Gérôme), 〈기독교 순교자들의 마지막 기도〉, 1863–1883

로마의 기독교 박해는 로마제국 제5대 황제 네로 때 시작되어 313년 콘스탄티누스 황제가 기독교를 공인할 때까지 약 250년 동안 이어졌다. 사도 시대 초기 기독교는 예수그리스도로 인정하지 않는 유대교의 핍박을 받았을 뿐 로마의 박해는 받지 않았다. 로마의 기독교 박해는 기독교가 예루살렘을 넘어 소아시아와 유럽까지 전파되면서부터 시작됐다. 처음에는 제국 차원의 박해 정책이 아니라 산발적으로 일어난 지역적 박해였고, 자유의 기간도 있었다. 그러다 250년 데키우스 황제가 로마제국 전역의 기독교 박해를 시행했다.
극심한 박해에도 기독교인들은 핍박과 순교를 두려워하지 않고 담대히 복음을 전했다. 그 결과 기독교를 믿는 사람이 갈수록 증가했고, 복음은 로마제국 전역과 지중해 연안 전체로 전파되었다.


배경

베드로는 네로 황제 때 순교했다고 전해진다.
카라바조(Caravaggio), 〈베드로의 십자가형〉, 1600

로마의 기독교 박해는 정치적 이유가 강했다. 본래 로마제국은 피정복민의 정치와 종교에 비교적 온건한 관용 정책을 펼쳤다. 로마에 충성을 맹세하는 속국은 그 지역의 왕권과 세습을 인정했고, 종교 문제도 개입하지 않았다. 또한 로마는 법치(法治)를 주장했기 때문에 중죄가 아닌 이상 사형을 집행하지 않았다. 그런데 유독 기독교인은 기독교를 믿는다는 이유로 지탄받고 사형까지 당했다. 이는 로마 종교와는 달라도 너무 다른 기독교의 색채가 위정자들에게 정치적 위협이 되었기 때문이다.

로마의 다신교

기독교가 전파될 당시 로마제국에는 여러 나라에서 수입된 다양한 종교가 있었다. 이집트의 대모신 이시스, 고대 페르시아(바사)의 태양신 미트라, 그리스의 유피테르(제우스), 머큐리(헤르메스), 미네르바(아테나) 등 많은 신들의 신전과 신상이 각지에 세워졌다. 신약성경 사도행전에는 아테네에 '알지 못하는 신에게'라는 제단도 있었다고 나온다.[1]
로마인들은 많은 신을 숭배할수록 그만큼 많은 축복을 받는다고 여겼고, 자신들이 신들을 공경하는 제사를 드리기 때문에 나라가 평안하다고 믿었다. 반대로 말하면 신들을 향한 제사를 소홀히 하면 나라에 재앙이 닥칠 것이라고 믿은 것이다.
로마제국에서 합법 종교란 로마제국의 신들에게 행하는 제사에 참여하는 종교를 의미한다. 이를 거부하면 불법 종교였다. 그런데 기독교가 이 제사를 거부한 것이다. 기독교인들은 자신들의 하나님만 섬기며 다른 신들을 위한 종교 의식에 참여하지 않았다.
로마의 신들에 대한 숭배를 거부하는 기독교인의 행동은 로마인들의 관점에서 볼 때 시민의 의무를 저버리고 제국의 평화와 번영을 위협하는 행위였다. 이에 기독교는 경계와 핍박의 대상이 될 수밖에 없었다.

로마의 황제 숭배

로마의 기독교 박해의 가장 큰 원인은 기독교가 황제 숭배를 반대했기 때문이다.
크로아티아 풀라에 있는 로마 초대 황제 아우구스투스 신전

로마의 기독교 박해의 가장 큰 원인은 기독교가 황제 숭배를 반대했기 때문이다. 로마인들은 기원전 2세기 중엽 그리스를 정복하면서, 통치자를 신격화해 숭배하는 그리스의 사상을 수용했다.[2] 율리우스 카이사르가 사후에 신으로 숭배된 것을 시작으로, 원로원은 폭군이 아니었던 황제가 죽으면 신격화해 그를 위한 신전을 짓고 제사를 지냈다. 이러한 황제 숭배는 종교적 제도일 뿐 아니라 제국의 단일화를 위한 수단이자 제국에 대한 충성을 위한 정치적 제도이기도 했다.[3]
황제 숭배는 살아 있는 황제를 대상으로 강요되기도 했다. 제3대 황제 칼리굴라(재위 37–41), 5대 황제 네로(재위 54–68), 11대 황제 도미티아누스(재위 81–96) 등 폭군들은 생전에 스스로를 신이라고 칭하면서 폭정을 합리화했다. 죽은 황제든 살아 있는 황제든, 다른 신을 숭배할 수 없는 기독교인들은 황제 숭배를 거부했고 로마제국은 이것을 시민의 의무를 거부하는 반국가적 행동, 황제에 대한 불충으로 간주했다.

기독교에 대한 오해

반사회적 집단

기독교에 대한 근거 없는 오해와 비난 여론도 로마의 기독교 박해를 불러일으켰다. 로마제국으로부터 합법 종교로 인정받지 못한 기독교는 예배당 건물을 소유하지 못했는데, 신전 없이 가정집에서 행하는 기독교인들의 예배는 로마인들의 의혹과 억측을 부추겼다.[4] 로마인들은 기독교의 성찬식을 인육을 먹는 의식으로 곡해했고, 기독교인들이 서로를 형제자매라고 부르는 것을 모여서 방탕을 즐기고 근친상간을 한다고 상상했다.[5]
기독교인들의 삶은 종교 생활뿐 아니라 사회생활에서도 로마인들과 달랐다. 기독교인들은 연극이나 검투사 경기를 관람하지도, 군인이나 공직에 진출하려 하지도 않았다. 그 이유는 극장이 로마 신들과 황제 숭배 관련 축제가 열리는 곳이었고, 검투 경기는 비윤리적이었기 때문이다. 공직에 나갈 경우 로마 신과 신격화된 황제들에게 충성을 맹세해야 했기에 피했던 것이다. 이처럼 '로마적이지 않은' 기독교에 대한 시선은 곱지 않았으므로 기독교는 반사회적인 집단이라는 지탄을 받았다.

미신

로마인에게 종교는 신들에게 제사하며 현세의 복을 기원하는 것이었다. 그러나 기독교는 이렇다 할 제사 의식이 없었고, 사람이 죽은 후의 세계에 대해 가르쳤다. 현세를 추구하는 종교에 길들여진 로마인들에게 기독교는 허황된 주장을 일삼는 '미신'에 불과했다.
또한 로마제국은 기원전 82년 제정된 '코르넬리우스 법'에 따라 알아들을 수 없는 주문을 외우는 행위를 금지했다. 코르넬리우스 법은 독살에 관한 법으로, 점차 의미가 확대되어 남을 해치기 위한 저주가 담긴 주문도 독살의 하나로 여겼다.[6] 그런데 기독교의 찬송을 일종의 주문으로 오해한 것이다.
로마의 철학가, 역사가 들은 기독교 신앙을 '매우 위험한 미신', '새롭고 사악한 미신'이라고 깎아내렸다. 고대 로마 역사가 타키투스(Cornelius Tacitus)는 '악한 행실과 인류에 대한 증오 때문에 미움을 받아 박해를 받았다'라고 했으며, 로마 제정 시기 전기 작가인 수에토니우스(Gaius T. Suetonius)는 '흉악한 신흥미신을 숭배하는 인종이었기 때문에 박해를 받았다'라고 박해를 정당화했다.[7] 그럼에도 기독교는 로마제국 전역으로 빠르게 전파되어 로마 기성종교에 두려움이 되었다.

유대교와 기독교 차이

기원후 60년 전까지 로마인들은 유대인과 기독교인을 구분하지 못했다. 초기 기독교인이 유대인이었고, 유대교와 기독교의 경전은 같은 구약성경이었다. 또 기독교인과 유대인이 똑같이 로마의 다신교를 거부했기에 기독교는 유대교의 한 분파에 지나지 않는다고 생각했다. 로마는 유대교를 탄압하기도 했지만, 유대인 조상 대대로 내려온 특유 종교라고 인정해 주었다. 유대인들은 많은 세금을 내는 조건으로 우상숭배와 관련된 의식을 면제받았고, 자기들의 전통 종교를 지켜나갈 수 있었다.
60년대 이후 로마인들은 기독교가 유대교와 다른 별개의 종교라는 사실을 인식하게 되었다. 선민사상을 가진 유대인들은 이방인에게 포교하지 않았지만, 기독교인들은 달랐다. 그들은 이스라엘을 넘어 로마제국 전체에 복음을 전파하며 많은 로마인을 기독교화시켰다. 특정 국교도 아니고, 내세울 만한 역사도 없는 기독교가 로마의 전통 종교를 위협하게 된 것이다.[8]

로마의 기독교 10대 박해

로마의 기독교 박해는 통치자와 시대 상황에 따라 다양한 이유와 양상으로 진행되었는데, 10명의 황제 시대 일어난 10대 박해가 대표적이다. 그중에는 국가적 차원에서 황제가 직접 주도한 기독교 박해보다 그 시대 사회적 분위기와 시민들의 고발로 인한 박해가 많다. 기독교가 불법 종교로 공식 선언된 것은 트라야누스 황제 때다. 또한 로마제국 일부 지역에서 간헐적으로 일어났던 기독교 박해는 데키우스 황제 때 제국 전역으로 확산됐다.

로마 황제 박해 시기 내용
네로 64–68년
  • 로마 대화재 사건 방화범으로 기독교인들 지목
  • 기독교인을 맹수의 밥으로 던지거나
    야외 파티 장소를 밝히는 인간 촛대로 삼아 불태워 죽임
도미티아누스 90–96년
  • 로마 제신 숭배 강화
  • 유피테르 신에게 바치는 유대인세 납부 거부한 기독교인 탄압
  • 사도 요한 밧모섬으로 유배
트라야누스 98–117년
  • 기독교를 해악을 끼치는 '불법 종교'로 규정
  • 안디옥 교회 감독 이그나티우스 순교
하드리아누스 117–138년
  • 황제 및 로마 신 숭배 강요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 161–180년
  • 기독교를 '미신'으로 여기고 경멸
  • 배교하지 않으면 사형
  • 177년 리옹 박해로 48명 순교
셉티미우스 세베루스 202–211년
  • 태양신 예배 강요
  • 기독교로 개종 금지
막시미누스 트락스 235–236년
  • 전임 황제가 기독교인들을 지지했다며 박해
  • 기독교 성직자 처단
데키우스 249–251년
  • 로마제국 전역의 기독교 박해 주도
  • 모든 국민은 로마 신들에게 제사드리라고 명령, 불복종 시 처형
  • 기독교 말살을 위해 기독교인들의 배교 회유
발레리아누스 257–260년
  • 기독교인 집회 금지
  • 기독교인 토지와 재산 몰수
  • 성직자 유배 및 처형
디오클레티아누스 303–311년
  • 기독교 박해 4개 칙령 발표
교회 건물 파괴, 성경 소각, 성물 압수
② 모든 기독교 성직자 체포
③ 로마 신에게 제물 바치는 성직자 사면, 불복종 시 처벌
④ 기독교인 남녀노소 불문 공공장소에서 사형 집행
  • 모든 기독교인 시민 권리 박탈
  • 기독교인 공직 추방
  • 기독교인 군사에게 신앙 거부 강요, 불복종 시 처형

※ 311년에 조직적인 기독교 박해 명령이 철회됐지만
    313년 밀라노 칙령 반포 전까지 로마의 기독교 박해는 사라지지 않았다.

네로

네로는 기독교인을 방화범으로 몰아 화형에 처했다.
헨리크 시에미라츠키(Henryk Siemiradzki), 〈네로의 횃불〉, 1876

로마의 기독교 박해는 로마의 대화재로 촉발되었다. 64년 7월 18일 밤 로마 기름 창고에 난 작은 불이 시내로 번졌다. 불길은 일주일 넘게 타올라 로마시의 3분의 2가 초토화됐다. 안티움(현재 지명 안치오)으로 휴가를 떠났던 네로(Nero Claudius Caesar Augustus Germanicus, 재위 54–68)는 화재 소식을 듣고 즉시 로마로 돌아와 인명 구조에 힘썼다. 황제의 개인 정원까지 개방해 이재민을 수용했다. 그런데 '네로가 로마에 불을 지르고 불타는 로마를 보며 노래를 불렀다'는 소문이 퍼졌다. 네로가 소실된 궁전 대신 새로 지은 황금궁전(Domus Aurea)이 아주 크고 공사도 아주 빨리 진행되어 소문은 기정사실화됐다.
흉흉한 민심을 달래기 위해 네로는 기독교인을 희생양으로 삼았다. 로마인들 사이에 반유대 정서가 널리 퍼져 있었는데, 유대인들 역시 반로마 정서가 절정에 이른 상태라 유대교인을 방화범으로 몰기에는 부담이 컸다. 그에 비해 기독교는 유대인과 로마인의 반감을 동시에 산 소수 종교였다. 이를 이용해 네로는 본의 아니게 기독교 박해 정책을 시작한 장본인이 되었다.
당시 방화 범죄자는 산 채로 태우는 것이 일반적인 처벌이었다. 맹수에게 던지거나 십자가에 못 박는 처벌은 노예 죄수에게 해당됐다. 로마시 대화재의 방화범으로 몰린 기독교인들은 대다수 하층민이었다. 이들은 짐승 가죽을 뒤집어쓴 채 굶주린 맹수에게 던져졌고, '인간 촛대'가 되어 기름을 바른 나무 기둥이나 건초에 묶여 불타 죽었다.
네로 시대 로마의 기독교 박해는 네로가 죽는 68년까지 계속됐다.[9] 사도 베드로바울도 네로의 박해 때 순교했다고 전해진다. 다만 이때는 로마시 외 다른 곳에서의 박해는 없었고, 속주 총독들에게 기독교 박해를 강요하지도 않았다.[10]

도미티아누스

도미티아누스의 박해 때 사도 요한이 밧모섬에 유배됐다.
니콜라 푸생(Nicolas Poussin), 〈요한이 있는 밧모섬 풍경〉, 1640

공포정치로 유명한 도미티아누스(Imperator Caesar Augustus Domitianus, 재위 81–96)는 90년대부터 기독교를 박해했다. 그는 강력한 왕권 정치를 위해 살아 있는 신(神)이자 로마 전통 신들의 수호자를 자처하며 신전들을 복원하고 제신 숭배를 강화했다.
단, '유대인세'를 내는 유대교는 합법 종교로서 황제 숭배와 제신 숭배를 면제받았다. 본래 유대인세는 유대 본토에 사는 유대인만 내는 세금이었는데, 도미티아누스는 재정 충원을 위해 로마제국 내 모든 유대인에게 유대인세를 거뒀다. 유대인 기독교인도 유대인세를 내면 우상숭배의 의무에서 벗어날 수 있었다. 그런데 유대인세가 유피테르 신에게 드려진다고 공포되면서 기독교인들이 유대인세를 거부한 것이다. 황제와 로마 신 숭배 거부, 거기에 납세 의무까지 거부하자 기독교는 반역의 무리로 치부될 수밖에 없었다. 이는 네로 이후 없던 기독교 박해를 불러오는 또 하나의 원인이 되었다.[11]
도미티아누스의 박해 때 사도 요한이 밧모섬(파트모스섬)에 유배되었다가 계시를 받고 요한계시록을 집필했다.

트라야누스

기독교를 불법 종교로 규정한 트라야누스의 흉상

트라야누스(Caesar Divi Nervae Filius Nerva Traianus Optimus Augustus, 재위 98–117)는 속주 출신의 첫 황제이자 로마제국의 최고 번성기를 이끌었던 황제로, 오현제(五賢帝)[12] 중 하나다. 정치적 평가는 훌륭한 왕이지만 그는 기독교 박해로 오점을 남겼다. 트라야누스는 기독교를 로마에 해악을 끼치는 종교라고 판단했다. 그래서 기독교를 불법 종교로 규정하고, 누구든지 기독교를 믿으면 사형에 처하라고 명령했다. 이때 안디옥(현재 안타키아) 교회 감독 이그나티우스가 로마로 압송되어 처형됐다고 전해진다.
트라야누스의 박해로 몇몇 기독교인이 죽었으나 대대적인 박해는 아니었다. 트라야누스는 '기독교인을 괴롭히거나 그들에 대한 근거 없는 비난을 받아들이지 말고, 명백히 반항을 저지르는 사람들만 처벌할 것', '익명으로 된 고발은 접수하지 말 것'을 권고하기도 했다.[13]

하드리아누스

하드리아누스(Publius Aelius Hadrianus, 재위 117–138)는 트라야누스의 전례대로 확실한 근거에 따라 기독교인들을 처벌하라고 권고했을 뿐 로마의 기독교 박해를 주도하지는 않았다. 그러나 로마 제신 및 황제 숭배를 거부하는 행위는 로마 사회에서 중범죄였기 때문에 기독교인들은 계속해서 지방 총독과 로마인들에게 박해를 당했다.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

유피테르 신전에 희생 제물을 바치는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가 새겨진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 개선문' 부조

철학가 황제로 유명한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Caesar Marcus Aurelius Antoninus Augustus, 재위 161–180)는 로마제국의 황금시대를 상징하는 황제다. 그는 로마 신들에 대한 신앙심이 깊은 대신 기독교를 미신이라 여기고 경멸했다.[14] 기독교 박해를 주도하지는 않았지만, 기독교를 배교하지 않는 자는 로마 시민의 경우 참형하고 나머지는 고문해 처형하도록 명령했다. 황제의 명령에 따라 주민들이 기독교인을 고발하고 행정관이 판결하면서 이전보다 많은 기독교인이 죽었다.[15]

  • 177년 리옹 박해
리옹에 있는 세 갈리아 원형극장(Amphithéâtre des Trois Gaules). 경기장의 기둥은 기독교 박해로 사망한 사람들의 기념비다.

아우렐리우스의 박해로 가장 유명한 사건이 177년 리옹 박해다. 갈리아의 고울 지방에서 시작돼 론 계곡의 비엔나와 리옹까지 확대된 박해였다. 정부 차원의 박해는 아니었지만 관리들의 묵인 아래 폭도들이 기독교인을 폭행해 감옥으로 끌고 갔다. 영국의 역사학자 톰 홀랜드는 이를 "폭력배가 거리를 휘젓고 다니면서 기독교인들을 사냥했다"라고 표현했다.[16] 갖은 겁박에도 믿음을 저버리지 않은 기독교인들은 맹수에게 던져지거나, 잔인한 고문을 당하다가 죽었다. 유대 역사가 요세푸스의 기록에 따르면 이때 48명의 기독교인이 처형됐다.

셉티미우스 세베루스

셉티미우스 세베루스(Lucius Septimius Severus Pertinax, 재위 193–211)는 집권 초기 기독교인들에게 관용을 베풀었고, 기독교인을 '선량하고 조용하고 근면한 시민'으로 인식했다. 그러다 잠재적 반란과 내란 등 제국 안팎의 위협을 극복하기 위해 종교혼합정책을 강행하면서, 모든 국민에게 "'정복되지 않는 태양(Sol inbictus, 솔 인빅투스)'에게 예배하고 태양이 지존의 신임을 인정하라"는 명령을 내리고 유대교와 기독교가 이를 거부하자 박해를 단행했다. 202년에는 유대교나 기독교로 개종하는 행위를 금지하는 칙령을 내렸다. 명령을 어기고 유대교 및 기독교로 개종한 자들은 원형극장에서 처형되기도 했다.[17] 단, 세베루스 시대의 박해는 알렉산드리아와 아프리카 북부 등지에서 국지적으로 일어났다.

막시미누스 트락스

세베루스 이후 로마의 기독교 박해는 일부 지방에서 간헐적으로 일어났을 뿐 황제들의 관용적인 태도로 기독교는 평화를 누렸다. 그런데 짧은 기간 보위에 있던 막시미누스 트락스(Gaius Julius Verus Maximinus Thrax, 재위 235–238) 때 기독교는 다시 박해를 받았다.
막시미누스는 사병 출신 황제라는 자격지심 때문에 전임 황제 세베루스 알렉산데르(Severus Alexander, 재위 222–235)와 원로원, 고위 가문에 대해 강한 적의를 품었다. 그래서 세베루스 알렉산데르가 기독교에 호의적이었다는 이유로 기독교 박해를 명한 것이다. 그의 박해로 많은 기독교 지도자가 유배를 떠났다.[18]

데키우스

데키우스 치하 250년에 발행된 제사증명서(옥시린쿠스 파피루스 3929, P. Oxy. 3929) 증명서의 소유자가 로마 신들에게 희생 제사를 하고 제물을 바쳤음을 확인하는 증명서다. 이집트 옥시린쿠스에서 발견된 제사증명서에는 위 P. Oxy. 3929 외에도 P. Oxy. 658,[19] P. Oxy. 1464, P. Oxy. 2990이 있다.

데키우스(Gaius Messius Quintus Decius, 재위 249–251)는 로마제국 전역의 기독교 박해를 최초로 주도한 황제다. 데키우스의 즉위 당시 로마제국은 이민족들의 침입, 경제적 위기, 전염병 유행 등으로 불안한 상태였다. 데키우스는 그 원인이 로마 전통 신의 진노 때문이라 보고, 한 제국 안에서 하나의 종교만을 허용하기로 했다. 그래서 250년 1월, 모든 국민에게 로마 신을 경배하고 행정관이 보는 앞에서 신성한 제물을 바치라는 칙령을 내렸다. 명령대로 로마 신에게 제사한 사람에게는 증명서(리벨루스, Libellus)가 발급됐고, 제사증명서가 없는 사람은 범법자로 간주됐다.[20]
기독교인들은 로마 신에게 제사하라는 황제의 명령을 거부해 체포됐다. 데키우스는 순교자가 아니라 배교자를 만드는 것이 목적이었다. 협박, 고문, 회유를 통해 기독교인을 변절시켜 로마의 전통 종교를 부흥시키려 했던 것이다. 그의 목적대로 일부는 변절자가 되었지만 대부분 순교의 길을 택했으며 로마와 예루살렘, 안디옥 주교들도 목숨을 잃었다.
로마 안에서도 데키우스의 기독교 박해를 비난하고 순교자들을 성원하는 여론이 높아 기독교 세력은 더욱 강해졌다. 혹독한 박해는 데키우스가 죽기 몇 달 전인 251년 초에 끝났다.

발레리아누스

발레리아누스(Publius Licinius Valerianus, 재위 253–260)는 재임 초기 기독교인들에게 호의적이었으나 입장을 바꿔 데키우스의 그리스도교 박해 정책을 더욱 강화했다. 257년 기독교인들의 공개적 모임을 금지시켰고, 258년에는 기독교인 처벌을 성문화(成文化)하는 칙령을 발표했다. 신앙을 버리지 않는 기독교 지도자들은 사형 또는 유배를 당하고 재산은 몰수됐다. 이때 카르타고의 감독 키프리아누스와 로마 감독 식스투스 2세 등이 처형됐다.

디오클레티아누스

유피테르와 디오클레티아누스가 함께 새겨진 주화

3세기 말 로마의 기독교 박해가 잦아들면서 기독교인들의 수가 증가했다. 중류층 로마인들이 입교했고 귀족들도 기독교의 영향을 받았다. 그러나 4세기 가장 비극적인 최후 기독교 대박해가 일어났다. 이 박해는 303년 디오클레티아누스(Gaius Aurelius Valerius Diocletianus, 재위 284–305)의 명령으로 시작됐다.
디오클레티아누스가 치세 말기에 갑자기 기독교를 박해한 이유는 분명하지 않다. 로마의 전통 종교를 열광적으로 믿던 부황제 갈레리우스의 영향, 로마제국의 완전한 통합을 이루려는 욕구, 군사들이 황제 숭배에서 멀어지지 않을까 하는 염려 등 여러 요인이 작용한 것으로 보인다. 또 디오클레티아누스는 285년부터 유피테르를 로마 최고 신으로 삼고, 유피테르가 보낸 지상의 대리자가 자신이라고 하며 스스로를 '요비우스(유피테르의 변형)'라고 칭했다. 자신이 새겨진 비문에는 '주이며 신(dominus et deus)'이라고 표시해 신정 체제를 추구하려 했다.[21]
유일신을 섬기는 기독교는 디오클레티아누스의 정치에 걸림돌이었다. 결국 그는 303–304년 기독교인 집회 건물 파괴 및 성경 몰수 등 기독교를 탄압하는 4개의 칙령을 발표했다. 정부와 군대에서는 기독교인을 해고해 기독교인의 사회적 권리를 박탈했으며, 교회 지도자를 유배 보내거나 처형했다. 또한 기독교들인에게 로마 신에게 제사하라고 명령하고, 복종하지 않으면 잔인하게 고문하고 죽였다. 궁전에서 화재가 발생하자 기독교인에게 죄를 뒤집어씌워 기독교인을 반역죄인으로 검거하기도 했다. 311년 조직적인 박해 명령을 철회하기도 했지만 기독교 박해는 사라지지 않았다. 그렇다고 기독교를 말살하지도 못했다. 오히려 박해 속에서 기독교 신앙은 더욱 불타올랐다.
디오클레티아누스 황제의 박해로 수천 명이 순교했다고 전해진다. 유세비우스 교회사에 따르면, "기독교 신봉죄로 유죄 판결 받은 죄인들을 감금할 공간이 없을" 정도였다.[22][23] 가혹한 탄압에 배교한 사람도 많았다. 배교할 때는 자신의 성경을 관리에게 넘겨주었는데, 여기에서 '넘겨주다'라는 뜻의 라틴어 '트라도(trādo)'[24]가 '배반자'를 가리키는 영어 '트레이터(traitor)'의 어원이 되었다.

기독교 공인

로마의 기독교 박해는 콘스탄티누스 1세의 기독교 포용 정책으로 끝났다. 콘스탄티누스는 313년 밀라노 칙령을 반포해 기독교를 공인했다. 전임 황제들이 정치적인 이유로 기독교를 박해했듯 콘스탄티누스는 같은 이유로 기독교에 관용을 베풀었다. 이후 기독교는 급성장했지만 세속화로 인해 진리와 신앙의 정신이 변질됐다. 392년에는 테오도시우스 1세(Theodosius the Great, 재위 379–395)가 기독교를 로마제국 국교로 선포했다.

같이 보기

외부 링크

참조

  • 줄리앙 리에스, 《기독교》, 이종인 역, 동아일보사, 2004.
  • F.F. 브루스, 《초대교회 역사》, 서영일 역, 기독교문서선교회, 2009.
  • 정기문, 《왜 로마 제국은 기독교를 박해했을까?》, 자음과모음, 2010.
  • 이상규, 《초기 기독교와 로마 사회》, SFC, 2016.

각주

  1. 사도행전 17:22–23. 바울이 아레오바고 가운데 서서 말하되 아덴 사람들아 너희를 보니 범사에 종교성이 많도다 내가 두루 다니며 너희의 위하는 것들을 보다가 알지 못하는 신에게라고 새긴 단도 보았으니 그런즉 너희가 알지 못하고 위하는 그것을 내가 너희에게 알게 하리라 
  2. 에드워드 기번, 《그림과 함께 읽는 로마 제국 쇠망사》, 황건 역, 까치글방, 2013, 97–98쪽
  3. 에드워드 기번, 《로마 제국 쇠망사》 제1권, 윤수인 외 역, 민음사, 2010, 76–77쪽
  4. 알리스터 맥그라스, 《기독교의 역사》, 박규태 역, 포이에마, 2015, 64쪽
  5. 토머스 R. 마틴, 《고대 로마사》, 이종인 역, 책과함께, 2015, 243쪽
  6. 최화선, 〈고대 로마 사회의 주술과 종교 개념에 대한 소고〉, 《서양고대사연구》 제47호, 한국서양고대역사문화학회, 2016, 187–190쪽
  7. 《기독교 대백과사전》 제5권, 기독문화사, 2003, 23쪽
  8. 필리프 반덴베르크, 《네로 광기와 고독의 황제》, 최상안 역, 한길사, 2003, 311–314쪽
  9. 후스토 L. 곤잘레스, 《초대교회사》, 엄성옥 역, 은성, 2012, 62쪽
  10. 안희돈, 《네로황제 연구》, 다락방, 2004, 158–165쪽
  11. 정기문, 〈도미티아누스의 기독교 박해〉, 《서양고전학연구》 제60권 1호, 한국서양고전학회, 2021, 187–190쪽
  12. 오현제. 《표준국어대사전》. 국립국어원. 로마 제정 시대 최성기(最盛期)에 가장 유능했던 다섯 명의 황제. 네르바, 트라야누스, 하드리아누스, 안토니누스 피우스,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를 이른다. 
  13. "Trajan," Encyclopaedia Britannica
  14. 이경윤, 《상식으로 꼭 알아야 할 로마 제국의 역사》, 삼양미디어, 2010, 318쪽
  15. "Marcus Aurelius," Encyclopaedia Britannica
  16. 톰 홀랜드, 《도미니언》, 이종인 역, 책과함께, 2020, 154–155쪽
  17. 후스토 L. 곤잘레스, 《초대교회사》, 서영일 역, 은성, 1987, 140–143쪽
  18. 이바르 리스너, 《로마 황제의 발견》, 안미라 역, 살림, 2007, 349쪽
  19. Bernard P. Grenfell et al., The Oxyrhynchus papyri, Vol. 4, Egypt Exploration Fund, 1898, pp. 49-50, "To the superintendents of offerings and sacrifices at the city from Aurelius... - thion son of Theodorus and Pantonymis, of the said city. It has ever been my custom to make sacrifices and libations to the gods, and now also I have in your presence in accordance with the command poured libations and sacrificed and tasted the offerings together with my son Aurelius Dioscorus and my daughter Aurelia Lais. I therefore request you to certify my statement. The 1st year of the Emperor Caesar Gaius Messius Quintus Trajanus Decius Pius Felix Augustus, Pauni 20.(아우렐리우스 시의 제사 감독관님들께, 해당 도시에 사는 테오도루스와 판토니미스의 아들 아우렐리우스 ... 가 신고합니다. 항상 제사와 제물을 신들에게 바치는 것이 나의 관습이었으며, 지금도 감독관님들 앞에서 명령에 따라 내 아들 아우렐리우스 디오스코루스와 딸 아우렐리아 리아스와 함께 헌주하고 제물을 바친 후, 제사음식을 맛보았습니다. 그러므로 나는 당신이 나의 진술을 확인해 줄 것을 요청합니다. 데키우스 피우스 황제 즉위 1년, 4월 20일)."
  20. 김경현, 《콘스탄티누스 황제와 기독교》, 세창출판사, 2019, 74쪽
  21. "The policy of Diocletian in Roman Empire (284-305 AD)," shorthistory.org
  22. 《기독교 대백과사전》 제5권, 기독문화사, 2003, 21쪽
  23. Philip Schaff et al., “Church History of Eusebius,” Nicene and Post-Nicene Fathers: Series II, Vol. 1, Christian Literature Publishing Co., 1890, "Book VIII, Chapter 6, 9. What was to be seen after this exceeds all description. A vast multitude were imprisoned in every place; and the prisons everywhere, which had long before been prepared for murderers and robbers of graves, were filled with bishops, presbyters and deacons, readers and exorcists, so that room was no longer left in them for those condemned for crimes."
  24. trādo. 《네이버 라틴어사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