니케아 공의회 (니케아 종교회의)

니케아 공의회(Council of Nicaea)는 소아시아의 니케아(지금의 튀르키예 이즈니크)에서 열린 세계적 공의회[1]다. '니케아 종교회의'라고도 한다.
니케아 공의회는 325년, 787년 두 차례 개최됐다. 제1차는 로마제국 황제 콘스탄티누스 1세(라틴어: Flavius Valerius Aurelius Constantinus, 재위: 306–337)가 소집한, 로마 가톨릭교회 최초의 종교 회의다. 주요 의제는 파스카 논쟁아리우스 논쟁이었다. 제2차는 787년 동로마제국(비잔틴제국)의 여황 이레네가 소집해 성화상(聖畫像) 숭배를 가결했다. 일반적으로 '니케아 공의회'라고 하면 역사적으로 큰 의미를 가진 제1차 니케아 공의회를 가리킨다.
세계 공의회는 '에큐메니컬 공의회(Ecumenical Councils, 라틴어: Concilium Ecumenicum)'라고도 하는데, 주교들의 토론으로 정통과 이단을 갈랐으며 역사적으로 일곱 번 이루어졌다. 제1차 니케아 공의회(325), 제1차 콘스탄티노폴리스(콘스탄티노플) 공의회(381), 에페소 공의회(431), 칼케돈 공의회(451), 제2차 콘스탄티노폴리스 공의회(553), 제3차 콘스탄티노폴리스 공의회(680), 제2차 니케아 공의회(787)다. 공교롭게도 세계 7대 공의회의 처음과 마지막이 니케아에서 열렸다.

니케아 공의회가 열린 니케아(현재 이즈니크)는 튀르키예(터키) 서북부 이즈니크호 동쪽 연안에 있다.

배경

 
제1차 니케아 공의회를 묘사한 그리스 메테오른 수도원의 성화

제1차 니케아 공의회는 325년 5월 니케아에 있는 로마제국 황제의 별궁에서 약 2개월간 열렸다. 세계 교회의 문제였던 아리우스 논쟁과 동방 교회와 서방 교회 간의 오랜 논쟁거리였던 파스카 논쟁을 해결하기 위한 회의였다. 그 외에도 교회 구조, 성직자 품위, 배교자들의 재입교와 공개적 참회 등의 교회법을 정했다.
니케아 공의회의 특이점은 종교회의를 교회 감독이 아니라 황제인 콘스탄티누스 1세가 개최했다는 점이다. 감독들의 체재 기간 경비도 황실에서 지불했다.[2]

개요

  • 기간: 325년 5–6월
  • 소집자: 콘스탄티누스 황제
  • 장소: 니케아, 황제의 별궁[2]
  • 참석자: 동방과 서방 교회 감독 300여 명[3]
  • 주요 의제: ① 아리우스 논쟁   ② 부활절 날짜 문제[4][5]

콘스탄티누스의 정치적 책략

콘스탄티누스는 313년 밀라노 칙령을 내려 기독교를 공인한 이래 '교회의 수호자'를 자처하며 교회에 영향력을 행사했다. 325년에는 기독교 교리를 정리한다는 명분 아래, 동방과 서방 교회 감독들을 니케아 공의회에 불러 모았다.
사실 니케아 공의회는 콘스탄티누스의 정치적 목적이 개입된 종교회의였다.[6] 콘스탄티누스는 혼란스러웠던 로마를 하나의 제국으로 묶고, 로마인 전체를 '하나의 황제, 하나의 신'으로 단일화하기 위해 기독교를 도입했다. 그런데 기독교가 여러 논쟁으로 내분에 빠지자 동방과 서방 교회의 갈등을 종식시키고 교리를 통일시켜 제국의 안정을 꾀해야 했던 것이다.[7] 그는 니케아 공의회의 의장 자격으로 연설까지 함으로써 교회 문제에 개입할 것과 교회 수장으로서 역할을 할 것을 분명히 천명했다.[8]

니케아 공의회 결의

니케아 공의회를 통해 결정된 사안은 크게 두 가지다. 하나는 그리스도의 신성을 부인한 아리우스주의의 퇴출과, 다른 하나는 초대교회가 고수해 오던 유월절 성찬식 날짜를 변경한 것이다.

아리우스주의 이단 규정

 
니케아 신조를 공포하는 모습을 묘사한 성화. 제1차 니케아 공의회는 니케아 신조를 공포해 아리우스주의를 정죄했다.
  • 아리우스 파문

니케아 공의회의 쟁점 사안 중 하나는 '아리우스 논쟁(Arius Controversy)'이었다. 아리우스 논쟁은 이집트 알렉산드리아 교회의 장로였던 아리우스가 예수 그리스도는 하나님이 아니라 피조물에 불과하다고 주장하면서 비롯되었다. 니케아 공회의에 참석한 300여 명의 감독 중에는 20여 명의 아리우스 추종자들이 있었다.
니케아 공의회에서 아리우스의 반대편에 선 사람은 아타나시우스였다. 알렉산드리아 출신으로 그리스인이었던 그는 하나님과 그리스도는 동등함을 주장하며 아리우스의 주장에 팽팽히 맞섰다. 콘스탄티누스는 모든 감독에게 '예수 그리스도는 하나님과 동일하다(호모우시오스[Homoousios, 헬라어: ὁμοούσιος, '동일 본질'이라는 뜻])'라는 내용의 니케아 신조에 서명할 것을 명했다. 이에 반대한 감독은 17명이었는데, 파문하겠다는 황제의 으름장에 최종 반대자는 2명으로 줄었다. 결국 서명을 거부한 아프리카 교회의 두 감독이 아리우스와 함께 파문되어 일리리아로 추방당했으며 아리우스의 책은 불태워졌다.

  • 니케아 신조 채택

니케아 공의회에서 선언된 '니케아 신조(영어: Nicene Creed, 헬라어: Σύμβολον τῆς Νικαίας, 라틴어: Symbolum Nicaenum)'는 기독교의 신앙 선언서라고 일컬어진다. 니케아 신조는 로마 가톨릭교회 신학의 근본 교의이며, 종교개혁 이후 등장한 수많은 개신교도 니케아 신조를 '삼위일체(三位一體)'라고 하여 기독교 정통교리로 받아들인다.
현재 기독교에서 일반적으로 말하는 니케아 신조는, 381년 콘스탄티노폴리스 공의회에서 니케아 신조를 개정하고 채택한 '니케아–콘스탄티노폴리스 신경(Niceno–Constantinopolitan Creed)'을 의미한다.

325년 니케아 신조 그리스어 원문 한국어 번역 [9]

Πιστεύομεν εἰς ἕνα Θεὸν Πατέρα παντοκράτορα
πάντων ὁρατῶν τε καὶ ἀοράτων ποιητήν·
καὶ εἰς ἕνα Κύριον Ἰησοῦν Χριστὸν
τὸν Υἱὸν τοῦ Θεοῦ,
γεννηθέντα ἐκ τοῦ Πατρὸς μονογενῆ
τουτέστιν ἐκ τες οὐσίας τοῦ Πατρος
Θεὸν ἐκ Θεοῦ,
Φῶς ἐκ Φωτός,
Θεὸν ἀληθινὸν ἐκ Θεοῦ ἀληθινοῦ,
γεννηθέντα, οὐ ποιηθέντα,
ὁμοούσιον τῷ Πατρί,
δι' οὗ τὰ πάντα ἐγένετο
τά τε ἐν τῷ οὐρανῷ καὶ τὰ ἐν τῇ γῇ,
τὸν δι' ἡμᾶς τοὺς ἀνθρώπους, καὶ
διὰ τὴν ἡμετέραν σωτηρίαν,
κατελθόντα,
καὶ σαρκωθέντα,
καὶ ἐνανθρωπήσαντα,
παθόντα,
καὶ ἀναστάντα τῇ τρίτῃ ἡμέρᾳ,
ἀνελθόντα εἰς τοὺς οὐρανούς,
ἐρχόμενον κρῖναι ζῶντας καὶ νεκρούς.
καὶ εἰς τὸ Ἅγιον Πνεῦμα.
Τοὺς δὲ λέγοντας Ἦν ποτε ὅτε οὐκ ἦν,
καὶ Πρὶν γεννηθῆναι οὐκ ἦν,
καὶ ὅτι Ἐξ οὐκ ὄντων εγένετο,
ἢ Ἐξ ἑτέρας ὑποστάσεως ἢ οὐσιάς φάσκοντας εἶναι
ἢ κτιστόν
ἢ τρεπτόν
ἢ ἀλλοιωτὸν τὸν Υἱὸν τοῦ Θεοῦ,
τούτους ἀναθεματίζει ἡ ἁγία καθολικὴ καὶ ἀποστολικὴ ἐκκλησία.

우리는 한 분이신 하느님을 믿는다.
그분은 전능하신 아버지이시며,
유형무형한 만물의 창조주이시다.
그리고 우리는 한 분이신 주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다.
그분은 하느님의 외아들이시며,
아버지에게서 나셨으며,
곧 아버지의 본질에서 나셨다.
하느님에게서 나신 하느님이시며,
아버지와 본질에서 같으시다.
그분으로 말미암아 만물이,
하늘에 있는 것들이나 땅에 있는 것들이 생겨났다.
그분은 우리 인간을 위하여,
우리의 구원을 위하여 내려오시어 육신을 취하시고,
사람이 되셨으며,
고난을 받으시고,
사흗날에 부활하시고,
하늘로 올라가셨으며,
산 이와 죽은 이들을 심판하러 오실 것이다.
그리고 우리는 성령을 믿는다.

["그분이 존재하지 않은 시대가 있었다.",
"나시기 전에 존재하지 않았다." 하고 말하는 사람들을,
또는 비존재에서 생겨났다거나,
다른 히포스타시스(hypostasis) 또는 우시아(ousia)에서 존재한다고 말하는 사람들을,
또는 하느님의 아들은 창조되었으며, 변할 수 있으며,
달라질 수 있다고 말하는 사람들을,
보편되고 사도로부터 이어오는 교회에서 파문한다.]

성찬식은 부활절에

니케아 공의회는 150년경부터 200여년간 이어진 파스카 논쟁(Paschal Controversies)에 종지부를 찍는 회의이기도 했다. 파스카 논쟁은 2–4세기 동방 교회와 서방 교회 간에 성찬식 날짜에 대한 주장이 엇갈리면서 생겨났다. 파스카(πάσχα)는 히브리어 페사흐(פֶּסַח)를 헬라어식으로 표기한 단어다. 페사흐는 이스라엘 백성이 애굽에서 해방된 날, 유월절을 의미한다.
당시 로마를 중심으로 한 서방 교회는 성경의 유월절에 행하던 성찬식을 부활절에 행했다. 그러나 동방 교회는 유월절 성찬식을 성력 1월 14일 저녁에 행하고, 유월절이 지난 일요일에 부활절을 지켰다.

그러나 동서방 교회 사이에는 차이가 있었다. 아시아에서 본 가장 중요한 날짜는 닛산(Nisan) 14일이었는데 ... 그리고 감사의 성찬식(Eucharist)을 거행하던 습관을 가졌었다. 그러나 서방 교회에서는 닛산 14일 다음의 일요일까지 금식을 계속하고 그리고 유월절 성찬식을 거행하였는데, 이는 그 주간 이날 일요일에 주께서 부활하셨다는 주장에서 왔다.
— J. W. C. 완드, 《교회사(초대편)》, 이장식 역, 대한기독교서회, 2000, 121쪽

콘스탄티누스는 이러한 차이를 못마땅하게 여기고, 성찬식 날짜를 통일하려고 했다. 그는 구세주를 십자가에 못 박게 한 유대인의 관습을 더 이상 따라서는 안 된다며, 니산월 14일(유월절)에 성찬식을 행하는 대신 서방 교회의 관습에 따른 날에 모든 사람이 성찬식을 거행하기를 요구했다.[10] 약 2개월간 진행된 니케아 공의회는 황제의 요구대로 성력 1월 14일에 행하는 유월절을 폐지하고 예수님이 부활하신 날에 성찬식을 행하기로 결의했다. 그리고 부활절 날짜는 '춘분 후 만월(보름) 후에 오는 첫 번째 일요일'로 변경했다.[11] 매년 달의 운행에 따라 날짜를 산출하기가 어렵다는 이유였다.

성 빅토르 교황(189-199년 재임) 때, 예수 부활 축일을 소아시아 각 지역 교회에서는 유다인의 빠스카, 즉 니산달 14일에 못박혀 돌아가신 것을 기념하고 나서 같은 달 16일에 지내고, 로마에서는 니산달 14일 다음에 오는 주일에 지냈었다. 지금처럼 부활 축일을, 춘분(3월 21일) 다음에 오는 보름 후 첫 주일에 지내게 된 것은 325년의 니체아 공의회에서 결의된 다음의 일이다.
— 제임스 C. 기본스,《교부들의 신앙》, 장면 역, 가톨릭출판사, 2005, 139쪽

이후 많은 신학자들은 파스카 논쟁을 '부활절 날짜에 대한 논쟁'으로 정의하고 '부활절 논쟁(復活節論爭)'이라 부른다.[12] 이는 파스카 논쟁에서 승리한 서방 교회의 주장대로 교회사가 기록되었기 때문이다. 사실 적합한 표현은 '유월절(파스카)[13] 논쟁'이다.

니케아 공의회의 한계

니케아 신조의 오류

  • 모호한 신조

니케아 공회의에서 채택한 '성부성자는 동등하다'라는 신조는 아리우스파를 일시적으로 단죄했을지는 몰라도, 이 또한 성경적 '성삼위일체'(聖三位一體)의 핵심에는 접근하지 못했다. 니케아 신조에서는 성자 예수 그리스도를 '성부의 외아들', '성부와 동일한 본질'이라고 표현한다. '동일 본질'이라는 의미로 쓴 '호모우시오스(ὁμοούσιος)'는 '성부=성자'라는 개념을 제시하지만 사실상 개념이 모호하다.[14] 그 결과 니케아 공의회 이후로도 그리스도의 본질에 관한 논쟁이 끊이지 않았으며,[15] 교회 역사에는 그리스도의 인성을 강조하는 유사 아리우스주의가 연이어 나타나 그리스도의 신성을 매도했다.
오늘날까지 삼위일체를 믿는다고 하는 기독교인뿐 아니라 신학자들까지 '예수 그리스도=하나님의 아들'은 인정하지만 '예수 그리스도=하나님'은 쉽게 시인하지 못한다. 성부와 성자는 한 분 하나님 안에 속할지라도 그 안에서 별개의 위격으로 존재한다고 하는 교회도 있고, 예수님을 인간과 같은 피조물이나 천사 중의 하나로 여기는 교회도 있다. 성부와 성자에 대해 뜻과 목적이 같기 때문에 일체라고는 표현하지만 실상 성부와 성자는 서로 다르다고 주장하기도 한다. 현대에 이르러 '성부와 성자는 본질상 차이가 있다'고 주장하는 여호와의 증인과 같은 일부 교파는 아리우스주의의 한 형태로 본다.
또한 니케아 신조에서는 성령에 대한 설명이 빠졌다. 니케아 공회의 이후의 기독교는 '성부=성령', '성자=성령'이라는 성경적 이해에 이르지 못하고 성령의 본질조차 깨닫지 못한 상태로, '삼위일체'라는 용어만 유명무실하게 신학 교리로 전해졌다.

  • 성경의 성삼위일체

니케아 공의회는 철학가들의 변증법 토론[16]과 황제의 정치적 야욕의 개입으로 진리를 판가름하는 자리였다. 성삼위일체는 신학 교리로 인정 또는 부정할 내용이 아니라 초대교회부터 강조된 성경의 진리다. 진리란, 종교회의를 소집해 신학자들의 논박을 통해 얻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직접 가르치시는 도(道)다.[17]
하나님의 가르침이 적힌 성경의 성삼위일체는, 성부 여호와 하나님과 성자 예수 그리스도, 성령 하나님이 모습과 이름이 각각 다르나 근본은 같은 한 분이라는 의미다.[18] 사도 바울이나 요한 등 성삼위일체를 이해한 사람은, 예수 그리스도가 창조주 여호와 하나님이라고 깨달았다.[19][20] 성령 또한 2000년 전 인류의 죄를 대신해 십자가에 희생하신 예수 그리스도이며,[21] 세상을 창조하신 여호와 하나님이다.[22]

유월절 폐지

니케아 공의회가 부활절에 성찬식을 행하기로 결의하면서 예수 그리스도가 새 언약으로 세우신 유월절이 폐지되었다. 새 언약 유월절은 '고난을 받기 전에 유월절 먹기를 원하고 원하였노라' 하신 예수님의 뜻에 따라 초대교회가 고수한 하나님의 절기다.[23][24] 초대교회는 성력 1월 14일 저녁에 유월절 성찬식을 행했다. 유월절 날짜는 유대인의 관습이 아니라 하나님이 계명으로 제정하신 날이기에 성도들은 이날 그리스도의 살과 피를 상징하는 떡과 포도주를 먹고 마시며 그리스도의 숭고한 희생을 기념했다.[25][26]
그러나 니케아 공의회 이후 유월절을 지키는 자들은 '십사일파(十四日派, 라틴어: Quārtadecimānī[콰르타데키마니], 영어: Quartodeciman[쿼토데시먼])'라고 불리며 이단으로 낙인찍혔다.[27] 점차 유월절과 부활절은 같은 날처럼 취급되었고 급기야 그리스도교 최대 명절인 유월절이 완전히 잊혔다. 유월절 다음 날, 즉 성력 1월 15일에 그리스도의 십자가 고난을 기리는 무교절 역시 사라졌고, '무교절 후 첫 안식일 이튿날(첫 일요일)'에 지키는 성경적인 부활절도 없어졌다.

이방 황제가 개입한 종교 회의

 
콘스탄티누스 1세의 동전. 동전의 뒷면에는 무적의 태양신이 묘사되었으며 '황제의 동반자인 무적의 태양신에게'라는 뜻의 솔리 인빅토 코미티(SOLI INVICTO COMITI)라는 문자가 새겨져 있다.
 
4세기경 제작된 모자이크에는 그리스도가 태양신으로 묘사되었다.

정치적 목적으로 교회에 호의를 베풀던 콘스탄티누스는 니케아 공의회를 통해 교회를 완전히 장악한 뒤에 교회를 이용해 로마제국 전체를 신권정치로 다스렸다.[28][29]
콘스탄티누스가 진정한 그리스도인이 되었다고 보기는 어렵다. 그는 로마의 최고 신이었던 태양신을 기독교의 하나님과 동일시했으며, 죽을 때까지 고대 로마 종교의 최고 제사장을 가리키는 '폰티펙스 막시무스(라틴어: Pontifex Maximus)'의 칭호를 고수했다.[30] 또한 자신에게 신적인 칭호와 '무적의 태양(라틴어: Sol Invictus, 솔 인빅투스)'이라는 수식어까지 부여했다.[30] 역사가와 기독교 신학자들은 콘스탄티누스가 기독교로 개종한 시점을 밀비우스 다리 전투에서의 승리 이후인 312년으로 보나,[31][32][33] 기독교로 개종한 이후 콘스탄티누스가 발행한 화폐에는 여전히 태양신 숭배 사상이 투영돼 있다. 그가 315년 발행한 화폐에는 '무적의 태양신'과 '황제의 동반자인 무적의 태양신에게'라는 글자가 새겨져 있고, 316년에 발행한 화폐에도 자신을 '태양신의 동반자'로 묘사하고 있다.[34] 콘스탄티누스의 영향으로 태양신교 신앙의 의식과 교리, 문화 등이 기독교에 대부분 수용되었다.[35]

니케아 공의회 이후

교회의 세속화

박해받던 기독교는 4세기 말 로마제국의 국교가 되었다. 황제의 권력을 등에 업은 교회의 권위는 대단했다. 국교회의 가르침을 이탈하는 행위는 모두 범죄였으며 국가 형법을 따라 처벌받았다.[36] 이제 기독교는 유행이었다. 신앙과 상관없이 출세를 위해 기독교로 개종하고 성직자가 되는 사람이 많아지면서 교회는 자연스럽게 이교화되고 세속에 젖어들었다.[37] 세속화되는 교회에 한탄한 그리스도인들은 광야로 나가 금욕 생활을 하며 진리를 지켰다.[38]
많은 권력을 누리게 된 교회 내에서도 최고 권력은 로마 교회의 감독에게 주어졌다. 330년, 콘스탄티누스는 서방 로마에 있던 수도를 동방 비잔티움으로 옮기고 자신의 이름을 본 따 '콘스탄티누스의 도시'를 의미하는 '콘스탄티노폴리스(라틴어: Constantinopolis, 그리스어: Κωνσταντινούπολις, 영어: Constantinople, 지금의 이스탄불)'라고 명명했다. 황제가 동방으로 떠나자 로마 교회의 감독은 서방에서 막강한 존재가 되었다. 나중에는 콘스탄티노폴리스 황실과 맞서는 힘까지 가졌다. 로마 감독은 자칭 '베드로의 자리를 계승한 자'를 자처하며 모든 교회 감독의 우두머리가 되었고, 교황이라 일컬어졌다.[39]

아리우스파의 득세와 쇠퇴

 
495년경 아리우스주의를 따른 게르만족(주황색)과 니케아 신조를 따른 동로마 제국(청록색)

니케아 공의회에서 아리우스주의가 축출된 듯했으나 아리우스파 지도자들은 곧 과거에 몸담았던 교회로 돌아왔다.[40] 이들은 음모를 꾸며 반대파 세력을 추방했으며, 336년 아리우스가 죽은 후로도 아리우스주의가 득세했다.
337년 콘스탄티누스 사후 니케아 신조를 옹호한 콘스탄스(재위: 337–350)는 서로마 황제가, 아리우스주의자들에게 호의적인 콘스탄티우스 2세(재위: 337–361)는 동로마 황제가 되었다. 350년 콘스탄티우스가 로마제국의 단독 군주가 되자 니케아 신앙을 고수하는 자들이 박해받았다.
364년, 로마는 다시 이분(二分)되어 동로마는 급진적 아리우스주의자인 발렌스(재위: 364–378)가 통치했다. 니케아 신조를 좇는 가톨릭 주교는 유배를 떠나거나 박해를 받았다. 378년 발렌스가 전사하자 당시 서로마 황제였던 그라티아누스(재위: 375–383)가 동로마를 지배했다. 그라티아누스는 발렌스가 추방한 주교들을 복직시켰고, 379년에는 군대 총사령관이었던 테오도시우스를 동로마의 황제로 선임했다.
테오도시우스 1세(재위: 379–395)는 확고한 니케아 신앙 기독교 신자였다. 그는 381년 콘스탄티노폴리스 공의회를 소집해 아리우스주의를 금지시킴으로써 아리우스논쟁에 종지부를 찍었다. 그러나 아리우스주의는 로마제국 내에서는 사라졌을지 몰라도 4세기부터 북쪽에서 서로마 영토로 내려온 게르만족 사이에는 계속 존속했다.
476년, 서로마제국이 게르만족 용병대장 오도아케르에게 멸망했다. 아리우스파 민족이 서로마를 점령한 것이다. 527년, 동로마 황제로 즉위한 유스티니아누스(재위: 527–565)는 로마 교황을 교회의 우두머리라고 공식 선언했고, 아리우스주의를 고수한 아프리카의 반달 왕국, 이탈리아의 동고트 왕국을 무너뜨렸다. 이후 게르만족들은 아리우스주의를 포기하고 니케아 신조와 로마 교회를 따르게 되었다.[41]

제2차 니케아 공의회

제2차 니케아 공의회는 787년에 열렸다. 세계 공의회로는 7번째 공의회다. 주요 의제는 726년 동로마제국 황제 레오 3세가 성상숭배를 금지하는 칙령을 내렸을 때 일어난 성화상논쟁(聖畫像論爭)[42]을 해결하는 것이었다. 그리스 아테네 출신으로 성상 숭배자였던 이레네 여제가 소집한 제2차 공의회에서는 성상파괴론을 이단으로 규정하고, 성상을 단순한 흠모의 대상에서 경배하는 대상으로 끌어올렸다.[43][44]

관련 영상

  • 사라진 유월절

같이 보기

외부 링크

각주

  1. "공의회". 《표준국어대사전》. 국립국어원. 교황이 온 세계의 추기경, 주교, 신학자 들을 소집하여 진행하는 공식적인 종교 회의. 교회 전체에 해당하는 교리나 규율에 관하여 토의하고 규정한다. 
  2. 2.0 2.1 김경현, 《콘스탄티누스 황제와 기독교》, 세창출판사, 2017, 225쪽
  3. 《한국가톨릭대사전》 제3권, 한국교회사연구소, 1996, 1467쪽, “참석자 수는 250명(에우세비오), 270명(에우스타시오), 300명 이상(콘스탄틴) 등 다양한 설이 있다. 아타나시오는 318명으로 얘기하고 있는데 ... 이는 아브라함의 종 318명(창세 14, 14)을 의미하는 성서상의 상징적 숫자로 보고 있다. 이 때문에 이후 동방에서는 제1차 니체아 공의회를 '318명의 공의회'로 부르곤 하였다.”
  4. 조인형, 《초기기독교사연구》, 한국학술정보, 2002, 435쪽, “니케아 종교회의에서 취급한 안건들은 니케아 신조와 부활절의 절기 문제 ....”
  5. 남경태, 《종횡무진 서양사 1》, 휴머니스트, 2015, “니케아 공의회는 ... 회의에서는 이단 문제 이외에도 부활절의 날짜를 확정하는 문제 등이 논의되었다.”
  6. "325년 니케아 공의회 개최". 《동아일보》. 2006. 6. 19. 
  7. "로마 제국 통일하고 종교 자유 선포한 콘스탄티누스". 《한겨레》. 2016. 5. 26. 그는 로마인 전체를 '하나의 제국, 하나의 황제, 하나의 신'이라는 이상으로 일치시키고자 그리스도교를 도입했는데, 그 종교가 자유를 얻자마자 내분에 빠졌던 것 ... 제국의 이념적 통일을 기대했던 콘스탄티누스 대제는 이 종교 분쟁을 최대한 빨리 해결해야 했다. 그는 이를 위해 325년에 니케아(Nicea) 공의회를 소집했다. 
  8. 김차규, 〈콘스탄티누스의 니케아 공의회 개최 의미〉, 《대구사학》 제70권, 대구사학회, 2003, 179-180쪽, “그는 자신의 이름으로 칙령을 내려 니케아 공의회를 소집하였을 뿐 아니라 이 공의회에 참석하지 않는 주교들에 대해서는 그 죄를 묻겠다고 했다. 또한 콘스탄티누스는 니케아 공의회가 열린 첫날 그 자신이 의장의 자격으로 연설을 하였다.”
  9. 후베르투스 R. 드롭너, 《교부학》, 하성수 역, 분도출판사, 2001, 345-346쪽
  10. 《한국가톨릭대사전》 제3권, 한국교회사연구소, 1996, 1467쪽, “콘스탄틴은 이 토론에서 다음과 같은 세 가지 기준을 고려하도록 요구하였다. ... 첫째, 모든 사람이 세계적인 축일을 같은 날에 거행하도록 한다. 둘째, 구세주의 사형 범죄에 책임을 지고 있는 원수인 유대인의 관습을 더 이상 따르지 않도록 한다. 셋째, 로마, 이탈리아 ... 등지에서 시행하고 있는 관습을 유지하면 좋겠다. 이러한 의견을 포함하여 토론한 결과 니산(Nîsãn)달 14일에 거행하는 유대인의 관습을 더 이상 따르지 않고, 춘분 이후 만월(滿月) 다음 주일로 확정하되 책력(冊曆) 계산은 알렉산드리아 주교좌에 위임하도록 하였다.”
  11. "춘분과 달력". 《동아일보》. 2020. 3. 21. 로마제국은 ... 325년에는 니케아공의회를 열어 교회 제도와 교리를 정비하기까지 했다. 공의회에서는 그동안 논쟁이 됐던 부활절 날짜를 '춘분이 지난 후 첫 번째 보름달이 뜬 후 첫 번째 일요일'로 결정했다. 
  12. "부활절논쟁", 《두산백과 두피디아》
  13. "πάσχα". 《네이버 고대 그리스어사전》. 1. 고유명사 유월절. 
  14. 레오 도널드 데이비스, 《초기 그리스도교 에큐메니컬 7대 공의회》, 이기영 역, 대한기독교서회, 2018, 91-95쪽, “'호모우시오스'(homoousios)는 정말 난해한 용어였다. ... 그러니까 호모우시오스는 영지주의 이단자들이 고안하고, 세례받지 않은 황제가 제안하였으며, 순박한 지지자들은 이 용어를 위험스럽게 여겼는데, 마침내 정통교회가 이 용어를 승인하여 '니케아 신조'에 삽입함으로써 다음에 이어지는 반세기 동안 엄청난 모순의 상징이 되었다.”
  15. 자와할랄 네루, 《세계사 편력 1》, 곽복희 외 역, 일빛, 2004, 157쪽, “기독교도들은 ... 예수의 신격과 삼위 일체설(the Trinity)을 놓고 논란과 분쟁으로 세월을 보냈다. 그들은 서로 이단자라고 욕설을 퍼부으며 박해를 가하고 목을 잘랐으며, 심지어 중모음 하나를 놓고 교파들 사이에 큰 논쟁이 벌어지기도 했다.”
  16. 이냐시오 오르티츠 데 우르비나, 《니케아·콘스탄티노폴리스 공의회》, 황치헌 역, 수원가톨릭대학교출판부, 2018, 86쪽, “토론하는 데에는 능숙하지 않았던 여러 주교들에 의해 이 직업적인 토론 전문가들이 끌어들여졌다는 것을 많은 것들이 암시하고 있다. 그때까지 사람들은 철학과 변증법에 호소하지 않고, 자신의 논거를 오로지 성경과 교회 전통에서 끄집어냈다.”
  17. 미가 4:1-2. 말일에 이르러는 여호와의 전의 산이 산들의 꼭대기에 굳게 서며 작은 산들 위에 뛰어나고 민족들이 그리로 몰려갈 것이라 곧 많은 이방이 가며 이르기를 오라 우리가 여호와의 산에 올라가서 야곱의 하나님의 전에 이르자 그가 그 도로 우리에게 가르치실 것이라 우리가 그 길로 행하리라 하리니 이는 율법이 시온에서부터 나올 것이요 여호와의 말씀이 예루살렘에서부터 나올 것임이라 
  18. 마태복음 28:19. 너희는 가서 모든 족속으로 제자를 삼아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의 이름으로 침례를 주고 
  19. 로마서 9:5. 육신으로 하면 그리스도가 저희에게서 나셨으니 저는 만물 위에 계셔 세세에 찬양을 받으실 하나님이시니라 아멘 
  20. 요한복음 1:1–14. 태초에 말씀이 계시니라 이 말씀이 하나님과 함께 계셨으니 이 말씀은 곧 하나님이시니라 ... 말씀이 육신이 되어 우리 가운데 거하시매 우리가 그 영광을 보니 아버지의 독생자의 영광이요 은혜와 진리가 충만하더라 
  21. 요한복음 14:26  보혜사 곧 아버지께서 내[예수님] 이름으로 보내실 성령 그가 너희에게 모든 것을 가르치시고
  22. 고린도전서 2:10 오직 하나님[여호와]이 성령으로 이것을 우리에게 보이셨으니 성령은 모든 것 곧 하나님의 깊은 것이라도 통달하시느니라
  23. 누가복음 22:15, 19-20. 이르시되 내가 고난을 받기 전에 너희와 함께 이 유월절 먹기를 원하고 원하였노라 ... 또 떡을 가져 사례하시고 떼어 저희에게 주시며 가라사대 이것은 너희를 위하여 주는 내 몸이라 너희가 이를 행하여 나를 기념하라 하시고 저녁 먹은 후에 잔도 이와 같이 하여 가라사대 이 잔은 내 피로 세우는 새 언약이니 곧 너희를 위하여 붓는 것이라 
  24. 고린도전서 11:23-26. 내가 너희에게 전한 것은 주께 받은 것이니 곧 주 예수께서 잡히시던 밤에 떡을 가지사 축사하시고 떼어 가라사대 이것은 너희를 위하는 내 몸이니 이것을 행하여 나를 기념하라 하시고 식후에 또한 이와 같이 잔을 가지시고 가라사대 이 잔은 내 피로 세운 새 언약이니 이것을 행하여 마실 때마다 나를 기념하라 하셨으니 너희가 이 떡을 먹으며 이 잔을 마실 때마다 주의 죽으심을 오실 때까지 전하는 것이니라 
  25. 고린도전서 5:7-8. 너희는 누룩 없는 자인데 새 덩어리가 되기 위하여 묵은 누룩을 내어버리라 우리의 유월절 양 곧 그리스도께서 희생이 되셨느니라 이러므로 우리가 명절을 지키되 
  26. 고린도전서 11:23-26. 내가 너희에게 전한 것은 주께 받은 것이니 곧 주 예수께서 잡히시던 밤에 떡을 가지사 축사하시고 떼어 가라사대 이것은 너희를 위하는 내 몸이니 이것을 행하여 나를 기념하라 하시고 식후에 또한 이와 같이 잔을 가지시고 가라사대 이 잔은 내 피로 세운 새 언약이니 이것을 행하여 마실 때마다 나를 기념하라 하셨으니 너희가 이 떡을 먹으며 이 잔을 마실 때마다 주의 죽으심을 오실 때까지 전하는 것이니라 
  27. 필립 샤프, 《교회사전집 3: 니케아 시대와 이후의 기독교》, 이길상 역, 크리스천다이제스트, 2004, 372-373쪽, “그 뒤부터는 모든 지역에서 부활절이 주일에 지키도록 의무화되었다. 유대교 유월절 당일이 아닌 니산 월 제14일 이후, 그러니까 춘분 이후 첫 만월 다음에 오는 주일이 부활절 날짜로 확정되었다. ... 항상 부활절을 니산 월 14일에 지켜온 십사일파(Quartodecimanians)의 유대교적 관습은 이때부터 이단이 되었다.”
  28. 존 줄리어스 노리치, 《비잔티움 연대기 1: 창건과 혼란》, 남경태 역, 바다출판사, 2016, 74-77쪽, “그리스도교 교회의 첫 공의회 ... 결과는 콘스탄티누스의 승리였다. 그는 모든 주요한 쟁점들을 자신이 원하는 방향으로, 그것도 거의 만장일치로 결정하는 데 성공했다. 이제 그는 동방 교회와 서방 교회의 통합을 이룬 것은 물론 그 자신이 통합된 교회 위에 군림하는 도덕적 절대자가 되었다.”
  29. 이노우에 고이치, 《살아남은 로마 비잔틴 제국》, 이경덕 역, 다른세상, 2010, 43-56쪽, “콘스탄티누스는 교의의 문제에는 그다지 깊은 관심이나 지식을 갖지 않았다. 그가 관심을 쏟은 것은 교회의 통일이었다. ... 로마 제국은 위기를 극복하고 살아남기 위해 이처럼 국가와 종교가 합치된 '신의 이름으로 타인을 지배하는' 체제를 만들어냈다.”
  30. 30.0 30.1 이냐시오 오르티츠 데 우르비나, 《니케아·콘스탄티노폴리스 공의회》, 황치헌 역, 수원가톨릭대학교출판부, 2018, 27-28쪽
  31. 김경현, 《콘스탄티누스 황제와 기독교》, 세창출판사, 2019, 68쪽, “기독교 측은 밀비우스 다리에서의 승리와 콘스탄티누스의 기독교 개종을 연결짓는 신화를 만들었다.”
  32. 폴 존슨, 《폴 존슨 기독교의 역사》, 김주한 역, 포이에마, 2013, "기독교 변증가들의 선전에 따르면, 밀리노 칙령은 ... 밀비안 다리에서 하나님을 경험한 이후에 기독교로 개종한 콘스탄티누스가 반포한 것이라고 한다."
  33. 닐 맥그리거, 《100대 유물로 보는 세계사》, 강미경 역, 다산초당, 2014, 324쪽, “‘카이로’는 로마 황제 콘스탄티누스가 312년 기독교로 개종한 다음에 채택한 상징이다. ... 밀비아 다리 전투에서 콘스탄티누스의 개종이 커다란 요인으로 작용했다.”
  34. "coin", British Museum, "Constantine is shown and described as the ‘companion’ of the sun god on a coin minted nearly four years after his reported conversion to Christianity on the eve of the battle of the Milvian Bridge."
  35. 라이온사 편, 《교회사 핸드북》, 송광택 역, 생명의말씀사, 1997, 130-131쪽
  36. 에드워드 기번, 《로마제국 쇠망사》 제2권, 송은주 외 역, 민음사, 2010, 195-196쪽
  37. 필립 샤프, 《교회사전집 3: 니케아 시대와 이후의 기독교》, 이길상 역, 크리스천다이제스트, 2004, 96-141쪽, “이러한 해악들은 '교회의 세속화'라는 일반적인 표현으로 요약할 수 있다. ... 수많은 이교적 관습들과 관행들이 이름만 바꾼 채 예배와 그리스도인의 삶에 끼어들었다. 로마 제국은 우상 숭배의 영향하에서 서서히 커왔기 때문에 일거에 마술적으로 변화될 수 없었다. 그러므로 세속화 과정과 이교화 경향이 나란히 맞물려 진행되었다.”
  38. J. W. C. 완드, 《교회사 초대편》, 이장식 역, 대한기독교서회, 2000, 283쪽, “콘스탄틴 대왕의 힘으로 교회에 평화가 찾아온 후로 교회의 수준이 갑자기 저하된 것을 한탄하여 광야의 금욕 생활에 나간 사람들이 허다하였다.”
  39. 자와할랄 네루, 《세계사 편력 1》, 곽복희 외 역, 일빛, 2004, 166-168쪽, “로마의 주교는 처음에는 다른 주교와 별로 다른 점이 없었지만 황제가 콘스탄티노플로 옮겨간 뒤부터 차츰 권위를 갖기 시작했다. ... 로마의 주교는 베드로의 자리를 계승한 자로서 주교 중의 우두머리로 여겨졌고, 나중에는 교황이라 일컬어지게 되었다.”
  40. 남성현, 《콘스탄티누스 가문의 기독교적 입법정책》, 한국학술정보, 2013, 25쪽
  41. 《기독교대백과사전》 제10권, 기독문화사, 2003, 932쪽, “모든 야만 왕국은 결국 아리우스주의를 포기했거나 아니면 이탈리아의 오스트로고트(동고트)족과 아프리카의 반달족의 경우처럼 아리우스주의를 받아들인 것이 민족적 멸망의 원인중 하나로 판명되었다. 주요 아리우스주의 민족들은 부르군트족·비시고트족·롬바르드족이었다. 이들 각 민족은 격심한 투쟁을 거친 뒤 차례로 자기들이 배웠던 아리우스주의 기독교를 니캐아-로마 신앙으로 바꾸었다.”
  42. "성화상논쟁". 《표준국어대사전》. 국립국어원. 성화 상이나 성화를 모시는 일을 우상 숭배로 볼 것이냐의 여부를 두고 일어난 논쟁. 
  43. "우상파괴 논쟁". 《글로벌세계대백과사전》. 이미 4세기경부터 성화상숭배의 풍조가 있었으나 일반적으로는 7세기에 성행이 되었다. ... 787년에 황비 이렌[이레네]은 제7회 공회의(公會議)에서 성화상 숭경을 부활시켰다. 
  44. "찬란했던 비잔틴 제국에 드리운 그림자". 《한겨레》. 2016. 7. 14. 황후 이레네는 콘스탄티노플의 총대주교와 함께 로마 교황과 협상한 뒤, 787년 제2차 니케아 공의회를 개최했다. 이 공의회에서는 성화상 파괴자 단죄와 성화상 공경 교리가 확정되었다. 이를 위해 '흠숭'(欽崇·latreia)은 하느님께만 해당되고 '공경'(proskynesis)은 피조물에게도 해당된다는 구별법을 활용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