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리아 (예수님의 모친)
마리아(Mary, 히브리어: מִרְיָם[미리암], 헬라어: Μαρία)는 예수님의 모친이자 목수 요셉의 아내다. 성경에는 마리아의 출생이나 죽음에 대한 기록이 없다. 갈릴리 지역의 나사렛 마을에 살던 처녀 마리아는 요셉과 정혼한 사이로, 혼인 전에 천사 가브리엘에게 성령으로 그리스도를 잉태할 것이라는 예언을 들었다. 이후 호적령에 따라 남편 요셉의 고향인 베들레헴으로 이동했다가 그곳에서 예수님을 낳았다. 예수님의 십자가 고난과 예수님 승천 후 오순절 성령 강림 당시에도 초대교회 성도들과 함께했던 것으로 성경에 기록돼 있다.
시대적 배경
유대는 기원전 63년경부터 로마의 지배를 받았다. 로마 황제 율리우스 카이사르가 이두메(Idumea, 에돔) 출신인 헤롯 안티파테르 2세(Herod Antipater Ⅱ, 재위: B.C. 43–B.C. 41)를 유대의 행정관으로 임명한 이후 그의 후손들이 팔레스타인 지방을 통치했다. 기원전 4년경 마리아가 예수님을 잉태할 당시 로마 황제 아구스도(Augustus, 아우구스투스)는 헤롯 안티파테르의 차남 헤롯 1세(Herod, 헤로데 1세, 재위: B.C. 37–B.C. 4)를 유대의 왕으로 임명했다. 헤롯 1세는 유대인의 왕이 탄생했다는 동방박사들의 말을 듣고 예수님을 죽이기 위해 베들레헴과 그 지경의 2세 이하의 남자아이들을 모두 학살하라고 명했다.[1]
마리아의 행적
예수님을 잉태함
마리아는 갈릴리의 작은 동네 나사렛에서 사는 처녀였다. 요셉과 정혼하고 유대의 혼례 전통에 따라 신랑을 기다리고 있던 중,[2][3] 천사 가브리엘을 통해 성령으로 아들을 잉태하여 낳을 것이라는 예언을 들었다. 천사는 태어날 아기의 이름을 '예수'라고 하라며 "하나님의 아들이라 일컬을 것이요 하나님께서 다윗의 위(位)를 저에게 줄 것"[4]이라고 전했다.[5] 이 말을 들은 후 마리아는 친척 엘리사벳을 방문해 하나님을 찬송하며 석 달간 함께 거했다.[6] 요셉의 꿈에도 천사가 나타나 마리아가 성령으로 잉태했음을 알리며 아내로 데려올 것을 두려워하지 말라고 말했다. 이 말을 들은 요셉은 마리아를 데려와 아들을 낳기까지 동침하지 않았다.[7]
예수님을 낳음
마리아가 예수님을 해산한 곳은 살던 곳 나사렛이 아니라 베들레헴이다. 마리아가 만삭일 때, 로마 황제가 로마 전역에 호적령을 내렸다. 마리아는 남편 요셉을 따라 다윗의 동네 베들레헴으로 갔고, 호적령으로 이동한 사람이 많아 사관에 머물 곳이 없어 그곳의 한 마구간에서 해산했다.[8] 베들레헴에서 하나님이 나실 것이라는 예언과 700여 년 전 선지자 이사야가 "처녀가 잉태하여 아들을 낳을 것이요 그 이름을 임마누엘[9]이라 하리라" 한 예언이 모두 성취된 것이다.[10][11] 밤중에 양 떼를 지키던 목자들이 그리스도가 태어났다는 천사의 기별을 듣고 와서 하나님께 영광을 돌렸다.[12]
성경에는 마리아가 예수를 해산한 이 날짜가 언제인지 특정할 수 있는 기록이 전혀 없다. 다만 "그 지경에 목자들이 밖에서 밤에 자기 양 떼를 지키더니"[13]라는 내용을 단서로 밤중에 가축을 방목할 수 있는 시기, 즉 겨울이 아닌 때로 추정한다.[14] 팔레스타인의 겨울은 춥고 우기(雨氣)여서[15] 밤에 목자들이 밖에서 양을 돌볼 수 없다.[16]
- 베들레헴 목동들의 양 떼 방목 모습
이스라엘 주민들에게 12월은 추운 때여서 목동이 밤에 양 떼를 밖에서 돌볼 수 없다.[17](Matson Collection, 1920)
마리아와 어린시절 예수님
마리아는 예수님이 성장하는 동안 몇 가지 특별한 일을 경험했다.
예수님이 태어난 지 8일이 되었을 때 마리아와 요셉은 할례를 위(Matson Collection, 1925)해 아기를 데리고 예루살렘에 올라갔다. 그때 선지자 시므온과 안나가 예수님을 칭송하며 사람들에게 비범한 말을 전했으며, 요셉과 마리아는 이를 기묘하게 여겼다.[18]
동방박사들이 예수님의 탄생 사실을 알고 헤롯왕에게 소식을 물어 베들레헴을 찾은 일도 있었다. 이들은 예수님에게 황금과 유향과 몰약 같은 예물을 드리며 경배했다.[19] 한편, 동방박사에게 '유대인의 왕이라 하는 그리스도가 베들레헴에 났다'는 소식을 들은 헤롯왕은 베들레헴과 인근 지역의 두 살 아래 사내아이를 다 죽이라고 명했다.[1] 천사가 요셉의 꿈에 나타나 애굽으로 피하라고 하자 마리아는 남편을 따라 예수님과 함께 애굽으로 피신했다.[20] 이후 헤롯왕이 죽은 후 다시 이스라엘로 돌아와 천사의 지시에 따라 갈릴리 나사렛 동네에 거주했다. 이 모든 것이 선지자들의 예언을 이루는 데 필요한 일련의 과정이었다.[21]
예수님이 열두 살이 되었을 때 마리아는 또다시 예사롭지 않은 일을 겪었다. 마리아와 요셉은 해마다 유월절을 지키러 예루살렘을 방문하는데, 유월절을 지키고 돌아올 때 예수님을 잃어버렸다. 그들은 사흘 후에 예루살렘에서 예수님을 만났는데, 예수님은 성전에 앉아 선생들과 질문과 답변을 주고받고 있었다. 마리아가 놀라며 근심하여 찾았다고 하자, 예수님은 "어찌하여 나를 찾으셨나이까 내가 내 아버지 집에 있어야 될 줄 알지 못하셨나이까"라고 말했다. 마리아는 이 모든 일을 소홀히 여기지 않고 마음에 두었다.[22]
가나의 혼인 잔치
복음 사역을 시작한 예수님은 어느 날 제자들과 함께 갈릴리 지역 가나 마을의 혼인 잔치에 참석했다. 마리아도 이 자리에 있었다. 잔치 도중에 포도주가 떨어지자 마리아가 이 사실을 예수님에게 알렸다. 예수님은 "무슨 상관이 있나이까 내 때가 아직 이르지 못하였나이다"라고 말했고, 마리아는 하인들에게 "(예수가) 너희에게 무슨 말씀을 하시든지 그대로 하라"라고 이르며 예수님에 대한 신실한 믿음을 나타냈다. 예수님이 하인들에게 그 자리에 있던 여섯 개의 돌항아리에 물을 채우라고 명하시자 하인들이 그대로 행했다. 예수님이 항아리를 연회장에 갖다 주라고 하여 하인들이 옮겨 놓자 물이 포도주로 변해 있었다. 이는 예수님이 처음 행하신 표적(이적)이었다.[23]
십자가 사건 후
예수님이 십자가에 달리실 때도 마리아는 곁에 서 있었다. 예수님은 제자 요한에게 마리아를 부탁했고, 마리아는 그때부터 요한의 집에 거했다.[24] 예수님이 부활하고 40일 만에 승천하신 이후에도 마리아는 제자들과 함께했다. 제자들은 성령 강림을 준비하며 예수님의 분부에 따라 예루살렘에서 모여 기도에 힘썼다. 그곳에 모인 이들 중에 마리아도 있었다.[25] 이 기록을 끝으로 마리아는 신약성경에서 더 이상 나오지 않는다.
마리아 숭배 논란
로마 가톨릭에서는 이 땅에서 예수님의 어머니였던 마리아를 숭배하고 있다. 마리아 숭배는 431년 에베소 공의회 이후부터 본격화됐다.[26] 종교개혁 이후 등장한 개신교에서는 마리아 숭배를 비판하고 나섰다.[27][28] 성경적 관점에서 마리아는 하나님의 백성 중 한 사람으로, 당시 수많은 유대 여인 가운데 하나님이 세상에 육체로 임하시기 위해 그를 선택하셔서,[11][7] 그리스도를 잉태하고 해산하는 축복을 받은 여인이라 본다.
같이 보기
각주
- ↑ 1.0 1.1 마태복음 2:16.
이에 헤롯이 박사들에게 속은 줄을 알고 심히 노하여 사람을 보내어 베들레헴과 그 모든 지경 안에 있는 사내 아이를 박사들에게 자세히 알아본 그 때를 표준하여 두 살부터 그 아래로 다 죽이니
- ↑ 누가복음 1:26–27.
여섯째 달에 천사 가브리엘이 하나님의 보내심을 받들어 갈릴리 나사렛이란 동네에 가서 다윗의 자손 요셉이라 하는 사람과 정혼한 처녀에게 이르니 그 처녀의 이름은 마리아라
- ↑ 필립 J. 킹 외, 《고대 이스라엘 문화》, 임미영 역, CLC, 2014, 99쪽, "결혼으로 가는 과정에서 첫 번째 단계는 약혼으로 그 기간은 몇 개월 지속되었다. 결혼 전에 행하진 이 약속은 때론 결혼 자체만큼 구속력이 있다."
- ↑ 누가복음 1:30–32.
천사가 일러 가로되 마리아여 무서워 말라 네가 하나님께 은혜를 얻었느니라 보라 네가 수태하여 아들을 낳으리니 그 이름을 예수라 하라 저가 큰 자가 되고 지극히 높으신 이의 아들이라 일컬을 것이요 주 하나님께서 그 조상 다윗의 위를 저에게 주시리니
- ↑ '하나님의 아들', '다윗의 위'는 육체로 등장하시는 하나님 곧 그리스도를 의미한다(이사야 9:6–7 참고).
- ↑ 누가복음 1:38–56.
마리아가 가로되 주의 계집 종이오니 말씀대로 내게 이루어지이다 하매 천사가 떠나가니라 이 때에 마리아가 일어나 ... 엘리사벳에게 문안하니 ... 마리아가 가로되 내 영혼이 주를 찬양하며 ... 마리아가 석 달쯤 함께 있다가 집으로 돌아가니라
- ↑ 7.0 7.1 마태복음 1:18–25.
- ↑ 누가복음 2:1–7.
이때에 가이사 아구스도가 영을 내려 천하로 다 호적하라 하였으니 이 호적은 구레뇨가 수리아 총독 되었을 때에 첫 번 한 것이라 모든 사람이 호적하러 각각 고향으로 돌아가매 요셉도 다윗의 집 족속인 고로 갈릴리 나사렛 동네에서 유대를 향하여 베들레헴이라 하는 다윗의 동네로 그 정혼한 마리아와 함께 호적하러 올라가니 마리아가 이미 잉태되었더라 거기 있을 그 때에 해산할 날이 차서 맏아들[예수]을 낳아 강보로 싸서 구유에 뉘었으니 이는 사관에 있을 곳이 없음이러라
- ↑ '임마누엘'은 '하나님이 우리와 같이 계신다'는 뜻으로 '육체로 오신 하나님', 즉 예수님을 가리키는 예언적 칭호다.
- ↑ 미가 5:2.
베들레헴 에브라다야 너는 유다 족속 중에 작을지라도 이스라엘을 다스릴 자가 네게서 내게로 나올 것이라 그의 근본은 상고에, 태초에니라
- ↑ 11.0 11.1 이사야 7:14.
그러므로 주께서 친히 징조로 너희에게 주실 것이라 보라 처녀가 잉태하여 아들을 낳을 것이요 그 이름을 임마누엘이라 하리라
- ↑ 누가복음 2:8–20.
- ↑ 누가복음 2:8.
그 지경에 목자들이 밖에서 밤에 자기 양떼를 지키더니
- ↑ "크리스마스는 원래 봄?...겨울로 옮겨진 성탄절의 사연은?", 《아시아경제》, 2017. 12. 21., "예수의 탄생일을 놓고 크리스트교 내에서도 2000년 가까이 논쟁이 지속됐지만, 정확한 탄생 기록이 남아있지 않다보니 진짜 크리스마스가 언제인지는 아무도 알지 못하는 상황이다. ... 12월 25일은 원래 로마의 동짓날 축제로 로마의 전통신인 사투르날리아(Saturnalia)의 축제가 열리는 주간이었다. 여기에 동방 페르시아에서 올라온 인기종교였던 미트라교(Mithraism)에서도 동짓날이 태양이 힘을 얻기 시작하는 날로 축제가 열렸다. 프랑스나 영국 지역에 살던 켈트족들도 동짓날 축제를 따로 열었다. 이렇게 다양한 민족들이 벌이던 공통 축제일을 아예 크리스마스로 못박은 것이다. 이것은 ... 당장 수많은 독실한 신도들의 반발을 몰고오기도 했다. 이교도 축제를 성탄절로 바꿔버린 것도 문제였지만, 성경에 묘사되는 예수 탄생의 배경과 겨울이 아예 맞지 않기 때문이었다."
- ↑ 가스펠서브, 《성경문화배경사전》, 생명의말씀사, 2018, 1644-1646, 1676쪽, "가나안 땅은 1년에 여름과 겨울 두 계절이 뚜렷하며, 그 외의 계절은 일종의 간절기라 할 수 있다. 1년 중 비가 전혀 오지 않는 5, 6월부터 9월까지를 여름 건기라 하고, 11월부터 다음해 3월 초순까지를 겨울 우기라 부른다. 가나안 땅의 비는 대부분 12월에서 다음 해 2월까지 집중된다. ... 겨울철에 비가 집중적으로 내리기 때문에(1년 강우량의 70% 이상이 12-2월 사이에 집중된다) 이때를 우기라 부른다. ... 팔레스타인에서 비가 집중적으로 내리는 때 곧 우기를 가리킨다. 이때는 대체로 날씨가 쌀쌀해지는 11월에서 다음해 3월 초순까지에 해당한다. 특히 우기 중에도 '큰 비'는 12월 말경에서 2월 중순에 집중되는 것을 볼 수 있다. 1년 강우량의 70% 이상이 이 기간중에 집중된다(일주일에 2, 3일간 계속 비가 내리는 경우가 많다). 이때 기온은 섭씨 10도 이하로서(예루살렘은 기온이 4-8도까지 내려간다고 함) 그곳 주민들에게는 매우 추운 날씨가 된다."
- ↑ 《가톨릭신문》, 2003. 12. 21., 15면, "사실 복음서에는 아기 예수가 어느 달에 태어났는지에 대한 아무런 언급이 없다. 루가 복음서를 살펴보면 '그 근방 들에는 목자들이 밤을 새워가며 양떼를 지키고 있었다'(루가 2, 8)고 적혀있으나, 12월의 이스라엘 땅은 너무 추워 목동들이 양떼를 데리고 들에서 밤을 지샐 수 없다고 한다. 루가는 아기 예수가 12월에 태어나지 않았다는 정보를 제공해 주고 있는 것이다."
- ↑ 필립 샤프, 《교회사》 제1권, 이길상 역, 크리스천다이제스트, 2004, 125쪽, "팔레스타인에는 계절이 건기와 우기, 즉 여름과 겨울밖에 없는데, 목축의 시기는 탈무드 저자에 따르면 3월에 시작하여 11월까지 지속되고, 11월쯤 되면 가축들을 들판에서 철수시켜 이듬해 2월말까지 우리에서 키운다고 한다."
- ↑ 누가복음 2:21–39.
- ↑ 마태복음 2:1–11.
헤롯왕 때에 예수께서 유대 베들레헴에서 나시매 동방으로부터 박사들이 예루살렘에 이르러 말하되 유대인의 왕으로 나신 이가 어디 계시뇨 우리가 동방에서 그의 별을 보고 그에게 경배하러 왔노라 ... 동방에서 보던 그 별이 문득 앞서 인도하여 가다가 아기 있는 곳 위에 머물러 섰는지라 저희가 별을 보고 가장 크게 기뻐하고 기뻐하더라 집에 들어가 아기와 그 모친 마리아의 함께 있는 것을 보고 엎드려 아기께 경배하고 보배합을 열어 황금과 유향과 몰약을 예물로 드리니라
- ↑ 마태복음 2:13–15.
저희가 떠난 후에 주의 사자가 요셉에게 현몽하여 가로되 헤롯이 아기를 찾아 죽이려하니 일어나 아기와 그의 모친을 데리고 애굽으로 피하여 내가 네게 이르기까지 거기 있으라 하시니 요셉이 일어나서 밤에 아기와 그의 모친을 데리고 애굽으로 떠나가 헤롯이 죽기까지 거기 있었으니 이는 주께서 선지자로 말씀하신바 애굽에서 내 아들을 불렀다 함을 이루려 하심이니라
- ↑ 마태복음 2:19–23.
헤롯이 죽은 후에 주의 사자가 애굽에서 요셉에게 현몽하여 가로되 일어나 아기와 그 모친을 데리고 이스라엘 땅으로 가라 아기의 목숨을 찾던 자들이 죽었느니라 하시니 요셉이 일어나 아기와 그 모친을 데리고 이스라엘 땅으로 들어오니라 아켈라오가 그 부친 헤롯을 이어 유대의 임금 됨을 듣고 거기로 가기를 무서워하더니 꿈에 지시하심을 받아 갈릴리 지방으로 떠나가 나사렛이란 동네에 와서 사니 이는 선지자로 하신 말씀에 나사렛 사람이라 칭하리라 하심을 이루려 함이러라
- ↑ 누가복음 2:41–51.
- ↑ 요한복음 2:1–11.
- ↑ 요한복음 19:25–27.
예수의 십자가 곁에는 그 모친과 이모와 글로바의 아내 마리아와 막달라 마리아가 섰는지라 예수께서 그 모친과 사랑하시는 제자가 곁에 섰는 것을 보시고 그 모친께 말씀하시되 여자여 보소서 아들이니이다 하시고 또 그 제자에게 이르시되 보라 네 어머니라 하신대 그 때부터 그 제자가 자기 집에 모시니라
- ↑ 사도행전 1:12–14.
제자들이 감람원이라 하는 산으로부터 예루살렘에 돌아오니 ... 저희 유하는 다락에 올라가니 ... 다 거기 있어 여자들과 예수의 모친 마리아와 예수의 아우들로 더불어 마음을 같이하여 전혀 기도에 힘쓰니라
- ↑ 가스펠서브, "에베소 공의회", 《교회용어사전 : 교파 및 역사》, 생명의말씀사, 2013,
알렉산드리아 대주교 시릴(Cyril)과 콘스탄티노플 대주교 네스토리우스(Nestorius) 사이에 벌어진 그리스도론, 즉 성모 마리아를 '하나님의 어머니'(Theotokos, Mother of God, 데오토코스)로 호칭할 수 있느냐에 관한 논쟁을 해결하기 위해 개최되었다. 네스토리우스는 안디옥 학파의 지지를 받고 있었는데, 당시 안디옥 학파는 그리스도의 인성을 중시하는 견해를 취하고 있었다. 따라서 마리아는 그리스도의 육신의 어머니이기는 하나 하나님의 어머니로 불리는 것은 옳지 않다는 견해를 보였다. 반면, 시릴은 그리스도의 신성을 강조하여 성모 마리아를 '하나님의 어머니'로 호칭하는 데 찬성하였다. 하지만 시릴은 이런 신학적 문제보다는 이 논쟁을 자신의 정치적 입지를 넓히기 위한 방편으로 이용했다. 6월 22일에 개최된 이 회의에서 시릴파는 에베소 주교 멤논(Memnon)의 지원을 받아 네스토리우스를 이단으로 규정하고 파면을 결의하였다.
- ↑ 신자들이 마리아에 더 매달리는 것은. 《한겨레》. 2019. 10. 20.
#폴란드 남부 쳉스토호바라는 도시의 바오로 수도원에서는 '블랙 마돈나'(검은 성모마리아)를 모시고 있다. ... 성화의 얼굴엔 칼자국 두개가 선명하다. 루터에 앞서 종교개혁 서막을 연 얀 후스의 파문과 처형에 반발한 종교개혁가들이 가톨릭 상징인 이 성화를 내동댕이치고 칼로 그어 생긴 자국이다.
- ↑ 마리아와 종교개혁. 《아름다운 동행》. 2017. 12. 1.
종교개혁자들이 개혁의 첫 모토로 외친 것이 "오직 성경"이었고, 개혁교회와 로마 가톨릭과의 간극은 1517년 종교개혁 이후 성경에 언급되어 있지 않은 마리아에 대한 신격화 때문에 더욱 벌어지고 있는 것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