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로(파라오, Pharaoh)는 고대 이집트의 왕을 가리키는 칭호(common title)다. 바로는 최고 통치자로서 정치적 지도자와 종교적 지도자의 역할을 함께 수행했으며 신격화되었다.
북쪽으로 이스라엘과 인접한 이집트는 성경 역사에도 자주 등장한다. 성경에서 이집트는 애굽으로, 파라오는 바로로 기록되었다. 단독으로 '바로'로 쓰이기도 하고,[1] 바로의 설명어인 '애굽 왕'을 더해서 '애굽 왕 바로'라고도 쓰였다.[2] '바로 느고'처럼 이름과 함께 결합해서 쓰인 경우도 있다.[3] 이름이 적힌 바로는 시삭, 소, 디르하가, 느고, 호브라 총 5명이다.
어원
바로의 기원은 고대 이집트 상형문자 페르아(pr-'o)다.[4] 페르아를 히브리식으로 읽은 파르오(פַּרְעֹה)[5] 를 다시 그리스식으로 읽으며 파라오(Φαραώ )[6]라는 발음이 정착했다. 헬라어 '파라오'를 영어로 표기한 것이 'Pharaoh'이며, 한자로 음차한 것이 '法老'(중국어 발음: fǎlǎo, 한국어 발음: 바로)다. 페르아의 본래 뜻은 '큰 집', '궁정'이다. 말 그대로 이집트 왕의 궁을 가리켰으나 제18왕조 중반(B.C. 1450년경)부터 페르아가 군주를 지칭하는 표현으로 확장되었고, 제22왕조(B.C. 945–B.C. 720) 때 군주의 칭호로 채택되어 군주의 이름과 연결되어 사용됐다.[7] 기원전 332년경 이집트가 알렉산드로스 대왕에게 정복된 이후 사용 빈도가 현저히 감소했다.
역할
정치 지도자
기원전 3150년경, 메네스가 상이집트(나일강 삼각주와 누비아 사이의 지대)와 하이집트(카이로 남부부터 지중해까지의 나일강 삼각주 지대)를 통일하며 이집트 제1왕조가 수립되었다. 이때부터 이집트의 군주는 '두 땅의 주인(Lord of the Two Lands)'이라는 칭호를 얻었다. 바로는 정치 지도자로서 이집트 전 국토의 소유권, 입법권, 세금 징수 및 재분배권을 가졌고 외교를 수행했다. 또한 교역 및 경제 활동을 통제했고 농민의 노동을 조직해서 토목 사업을 명령하기도 했다.
종교 지도자
바로는 '모든 사원의 수장(High Priest of Every Temple)'이라는 칭호도 가졌다. 바로는 제사의 집행자였고 사원의 위치를 정해 건축을 명령했다. 국가를 방어하거나 필요한 자원을 얻기 위한 전쟁의 주관과 군대 통솔권도 종교 지도자로서의 권한이었다. 이는 전쟁을 균형의 신 마아트(Ma'at, 태양신 라의 딸)와 질서를 회복하는 신 호루스(Horus)[8]에게 드리는 제사의 일부로 생각했기 때문이다.[9]
신격화
이집트는 통치자를 신의 화신 혹은 신의 아들로 믿었다. 특히 이집트의 주요 신 중 하나인 호루스는 이집트와 파라오의 수호신이자 파라오 자체를 상징했다.[11] 이집트 전설에서는 제1왕조 1대 파라오 메네스가 신 호루스에게서 왕좌를 상속받았다고 설명한다. 제2왕조 때는 파라오의 이름에 태양신 라(Ra)가 결합했는데,[12] 호루스와 더불어 라도 파라오의 수호신이 되었음을 보여준다. 이집트에서는 바로가 호루스의 화신 그 자체이며 태양신 라의 아들로 태양신과 유사한 신적 존재로 숭배됐다.[13]
파라오의 공식 칭호에도 파라오가 호루스 및 라와 동일시되고 있다는 것이 드러난다. 상형문자로 표현된 이집트 최고 지도자의 공식 칭호는 호루스 이름, 네브티 신의 상징인 네브티 이름, 황금 호루스 이름, 상하 이집트 왕명(즉위명), 라의 아들명(출생명)까지 총 5개 칭호로 구성된다(Five-name Titulary). 그중 라의 아들명은 파라오가 태양의 아들이라는 것을 강조하고 호루스 이름은 파라오가 곧 호루스임을 뜻한다.
파라오, 곧 최고 지도자를 신격화하는 관습은 다른 고대 국가로도 전승됐다. 마케도니아의 알렉산드로스 대왕은 이집트를 정복했을 때, 자신이 아문-라의 아들이라는 신탁을 받았다고 선전했으며 그리스 국가에서는 제우스의 아들로 불렸다. 로마 제국에서는 황제 숭배 사상이 등장했다.[14] 일례로 로마가 이집트를 정복하고 세운 비문에 적힌 옥타비아누스의 수식어는 "신, 신의 아들, 위대한 외국인 신, 카이사르 아우토크라토스"이며, 죽은 카이사르가 신격화되면서 옥타비아누스 또한 사후에 '신의 아들'로 인식됐다.[15]
성경 속 바로
구약성경에는 시삭, 소, 디르하가, 느고, 호브라처럼 이름이 언급된 5명의 바로와, 이름이 나오지 않는 바로들이 등장한다.
성경 속 바로 | 성경 구절 | 추정 인물[16] |
---|---|---|
아브라함 시대의 바로 | 창 12:10-20 | 제11-12왕조 파라오 중 1명 |
요셉 시대의 바로 |
창 37:36-50:9 | 제12왕조 파라오 중 1명[17] |
요셉을 알지 못하는 새 바로 | 출 1:8-22 | 제18왕조 파라오 중 1명 |
모세 출생 시의 바로 | 출 2장 | |
출애굽 시기의 바로 | 출 5-15장 | |
비디아의 아버지 바로 | 대상 4:18 | 미상 |
에돔의 왕자 하닷을 맞이한 바로 | 왕상 11:15-22 | 제21왕조 파라오 중 1명 |
솔로몬의 장인 바로 | 왕상 3:1, 7:8, 9:16-24, 11:1-20 | 제21-22왕조 파라오 중 1명 |
시삭(Shishaq) | 왕상 11:40, 14:25, 대하 12:1-9 | 제22왕조 셰숑크 1세 |
소(So) | 왕하 17:4 | 제22왕조 오소르콘 4세 혹은 제24왕조 테프나크트 |
히스기야 시기의 바로 | 왕하 18:21 | 제25왕조 샤바카 |
디르하가(Tirhaqah) | 왕하 19:9-36, 사 37:9 | 제25왕조 타하르카 |
느고(Necho) |
왕하 23:29-35, 렘 25:1-19, 46:2 | 제26왕조 네코 2세 |
호프라(Hophra Apries) | 렘 37:1-11, 44:30, 겔 17:11-17, 29:1-3 | 제26왕조 와히브레 |
아브라함 시대
창세기 12장에는 아브라함과 그의 아내 사라가 가나안의 기근을 피해 애굽으로 이동하는 모습이 기록되어 있다. 아브라함은 사라의 아름다움으로 애굽 사람들이 자신을 죽이고 사라를 취할 것을 우려해 사라를 누이로 소개했다. 애굽의 바로가 사라를 아내로 삼으려고 많은 예물을 아브라함에게 주었다가 재앙을 받았다. 바로는 사라가 아브라함의 아내인 것을 알고 사라를 다시 아브라함에게로 보냈다.[18]
요셉 시대
요셉이 애굽에 노예로 있을 때, 바로는 살진 일곱 암소가 흉악한 일곱 암소에게 먹히는 꿈과 마른 일곱 이삭이 좋은 일곱 이삭을 먹는 꿈을 꾸었다. 바로는 술 맡은 관원장의 추천을 받아 요셉을 만났다. 요셉이 애굽에 7년의 풍년이, 7년의 흉년이 있을 것에 대한 꿈이라며 꿈을 해석하자 바로는 요셉을 총리로 세웠다. 요셉은 7년간의 풍년 동안 곡식을 저축해 흉년을 대비했다.[19] 흉년 때 야곱의 일가족이 애굽 땅 고센에 이주했다.[20]
이스라엘의 애굽 이주 연대를 기원전 19세기로 보면 요셉 시대의 바로는 이집트 중왕국 시대의 전성기를 이끈 제12왕조의 파라오로 추정된다.
애굽 거주기
요셉을 알지 못하는 새 바로
애굽 내에 이스라엘 민족의 수가 많아지자 '요셉을 알지 못하는' 바로는 이들의 반란을 두려워했다. 바로는 이스라엘 민족을 노예 삼아 국고성 비돔과 라암셋을 건설하는 일에 동원했다.[21] 신약성경 사도행전에는 이 바로가 요셉을 알지 못하는 새 임금으로 언급되었다.[22]
모세 출생 시 바로
이스라엘 민족을 노예로 동원해도 수가 줄지 않자, 바로는 이스라엘인 남자아이를 모두 죽이라는 명령을 내렸다.[23] 모세의 모친 요게벳은 이 명령을 피해 모세를 갈대 상자에 담아 강가에 숨겼다. 바로의 딸이 그 상자를 발견하고 모세를 양자로 삼았다. 신약성경 히브리서에도 이 바로가 기록되었다.[24] 왕궁에서 성장한 모세는 애굽인에게 맞으며 노역에 시달리는 이스라엘인의 모습을 보고 분노해 애굽인을 죽였다. 이 일로 바로가 모세를 죽이려 하자 모세는 미디안으로 도망갔다. 몇 년 후 이 바로는 죽고 새로운 바로가 즉위했다.[25]
출애굽 시기 바로
하나님의 분부로 다시 애굽으로 간 모세는 새로운 바로를 대면하고 이스라엘 민족 해방을 요구했다. 바로가 듣지 않자 하나님은 애굽에 10가지 재앙을 내리셨다. 재앙이 하나씩 내릴 때마다 이스라엘 해방을 약속했던 바로는 재앙이 멈추면 뜻을 번복했다. 장자가 죽는 마지막 열 번째 재앙이 내렸을 때 장자를 잃고서야 바로는 이스라엘인을 해방시켰다. 곧 마음을 바꿔 군대를 이끌고 출애굽한 이스라엘 민족을 추격했지만 홍해의 기적으로 애굽 군대는 바다에 수장되었다.[26] 출애굽기 9장을 인용한 신약성경 로마서 9장에 이 바로가 등장한다.[24][27]
출애굽 시기를 기원전 15세기로 보면, 이스라엘 민족의 애굽 포로기를 통치한 바로들은 고대 이집트의 신왕국 시기를 시작한 제18왕조의 파라오들 중 기원전 16-15세기에 재위한 파라오들로 추정된다.
비디아의 아버지 바로
역대상에는 유다 지파 메렛의 아내로 '바로의 딸 비디아'가 소개되었다.[28] '비디아'는 여호와의 딸이라는 뜻이다.[29] 비디아나 메렛에 대한 다른 정보가 없어 학자들은 비디아의 아버지 바로가 누구인지 알 수 없다고 한다.[30]
이스라엘 통일 왕국 시대
하닷을 맞이한 바로
다윗이 에돔에 있을 때에 군대장관 요압이 ... 에돔의 남자를 다 쳐서 죽였는데 ... 그때에 하닷은 작은 아이라 ... 애굽으로 가서 애굽 왕 바로에게 나아가매 바로가 저에게 집을 주고 먹을 양식을 정하며 또 토지를 주었더라 하닷이 바로의 눈 앞에 크게 은총을 얻었으므로 바로가 자기의 처제 곧 왕비 다브네스의 아우로 저의 아내를 삼으매 ... 하닷이 애굽에 있어서 다윗이 그 열조와 함께 잔 것과 군대장관 요압의 죽은 것을 듣고 바로에게 고하되 나를 보내어 내 고국으로 가게 하옵소서 바로가 저에게 이르되 네가 나와 함께 있어 무슨 부족함이 있기에 네 고국으로 가기를 구하느뇨
다윗이 군대장관 요압을 에돔에 보내 에돔 남자를 모두 죽인 일이 있었다. 이때 에돔 왕자 하닷이 애굽으로 망명했다. 바로는 하닷을 맞이해 토지를 제공했고 자신의 처제와 결혼시켰다. 이 바로는 이집트 제21왕조 아메네모페(Amenemope), 시아문, 프수센네스 2세 등으로 짐작된다.[7]
솔로몬의 장인 바로
전에 애굽 왕 바로가 올라와서 게셀을 탈취하여 불사르고 그 성에 사는 가나안 사람을 죽이고 그 성읍을 자기 딸 솔로몬의 아내에게 예물로 주었더니 솔로몬이 게셀과 아래 벧호론을 건축하고
게셀을 침략한 바로는 자신의 딸을 솔로몬에게 시집보내며 게셀성을 딸에게 지참금으로 주었다. 솔로몬이 이 성을 재건했다. 열왕기상 곳곳에 솔로몬의 아내인 바로의 딸이 언급되었다.[31]
바로 시삭
바로 시삭은 이집트 제22왕조 1대 파라오 셰숑크 1세다. 성경에서는 시삭을 바로라는 호칭으로 부르지 않고 '애굽 왕'으로만 불렀다. 시삭의 재위 기간은 솔로몬 재위부터 이스라엘 왕국 분열 초기와 겹친다.
이러므로 솔로몬이 여로보암을 죽이려 하매 여로보암이 일어나 애굽으로 도망하여 애굽 왕 시삭에게 이르러 솔로몬의 죽기까지 애굽에 있으니라
솔로몬의 신하 여로보암은, 우상을 숭배한 솔로몬에게서 나라를 빼앗아 자신이 10지파를 얻을 것이라는 예언을 들었다.[32] 이를 알게 된 솔로몬이 자신을 죽이려 하자 시삭이 통치하는 애굽으로 도피했고, 솔로몬이 죽은 후에 이스라엘로 돌아왔다.
르호보암왕 오 년에 애굽 왕 시삭이 예루살렘을 치러 올라오니 ... 여호와의 말씀이 너희가 나를 버렸으므로 나도 너희를 버려 시삭의 손에 붙였노라 하셨다 한지라 ... 애굽 왕 시삭이 올라와서 예루살렘을 치고 여호와의 전 보물과 왕궁의 보물을 몰수히 빼앗고 솔로몬의 만든 금방패도 빼앗은지라
솔로몬의 아들 르호보암은 우상을 숭배하는 범죄에 빠졌다. 그 결과, 바로 시삭이 병거 1200승과 마병 6만을 비롯해 리비아와 에티오피아 등의 용병으로 이뤄진 막대한 군사를 이끌고 남 유다 왕국을 공격했다. 선지자 스마야는 유다 백성이 하나님께 죄를 지어 시삭의 침략을 받게 되었다고 말했다. 시삭은 남 유다의 여러 성읍을 정복하고 예루살렘을 공격해 성전과 왕궁의 보물을 약탈했다.
북 이스라엘 말기
바로 소
앗수르 왕 살만에셀이 올라와서 호세아를 친 고로 호세아가 신복하여 조공을 드리더니 저가 애굽 왕 소에게 사자들을 보내고 해마다 하던 대로 앗수르 왕에게 조공을 드리지 아니하매 앗수르 왕이 호세아의 배반함을 보고 저를 옥에 금고하여 두고
앗수르에 조공을 바치던 북 이스라엘 왕국의 호세아왕은 앗수르에 반기를 들며 애굽 왕 소에게 원군을 요청했다. 이에 앗수르 왕 살만에셀(샬마네세르 5세)이 북 이스라엘을 다시 침공해 3년 동안 포위했고, 호세아 9년(B.C. 721년경)에 사마리아가 함락됐다.
북 이스라엘 말기에 이집트는 여러 왕조가 난립하던 제3중간기였고,[33] 실제로 '소'라는 이름을 사용한 파라오가 없었기 때문에 특정 파라오를 지목하기 어렵다. 호세아와 재위 기간이 겹치는 제22왕조의 마지막 파라오 오소르콘 4세(Osorkon IV, 재위: B.C. 730-B.C. 715)의 약어를 'So'로 보기도 한다.[34] 최근 연구에 따르면, '소'는 파라오명이 아니고 제24왕조 파라오 테프나크트(Tefnakht)가 수도로 삼은 사이스(Sais, 현재 이집트 델타의 도시)를 말하며, 호세아는 소(사이스)에 있는 테프나크트에게 지원을 요청했다는 주장도 있다.[35]
히스기야 시기 바로
살만에셀이 북 이스라엘을 정복한 후, 앗수르의 새 왕 산헤립(센나케리브)은 남 유다와 애굽까지 공격하기 위해 남진했다. 당시 남 유다 왕은 히스기야였다. 히스기야가 산헤립에게 성전의 모든 금과 은을 바쳤으나, 산헤립은 앗수르로 돌아가지 않고 랍사게[36]를 남 유다에 보냈다. 랍사게는 예루살렘의 큰 길에 서서, 애굽에 원군을 요청하려는 히스기야에게 ‘상한 갈대와 지팡이 같은 애굽의 바로를 의지하면 망할 것’이라며 위협했다.[37]
북 이스라엘이 멸망하고 히스기야가 남 유다를 통치하던 당시, 이집트는 제25왕조의 샤바카(Shabaka)가 다스리고 있었으므로 랍사게가 말한 바로는 샤바카로 추정된다.[38]
바로 디르하가
바로 디르하가는 누비아인들이 수립한 제25왕조의 타하르카(Taharqa)다. 성경에는 '구스 왕 디르하가'로 표현되었다. 오늘날의 에티오피아 일대에 위치했던 고대 누비안 왕국을 구스라고 한다. 디르하가가 앗수르와 전쟁할 때는 아직 파라오 즉위 전이었고 구스의 왕이었기 때문에 바로라는 호칭이 붙지 않았다.[39] 디르하가는 바로 샤바카를 죽인 이후에 바로로 즉위했다.
앗수르 왕이 구스 왕 디르하가가 나와서 더불어 싸우고자 한다 함을 듣고 다시 히스기야에게 사자를 보내며 가로되 너희는 유다 왕 히스기야에게 이같이 말하여 이르기를 너의 의뢰하는 네 하나님이 예루살렘을 앗수르 왕의 손에 붙이지 않겠다 하는 말에 속지 말라
히스기야가 바로(샤바카 추정)에게 원군을 요청하자, 바로는 자신의 형제인 디르하가를 남 유다에 출병시켰다. 이 소식을 들은 앗수르의 산헤립은 예루살렘을 빨리 정복하고 애굽 군대에 대항하기 위해 히스기야에게 다시 랍사게를 보내 위협했다. 그러나 하나님이 사자를 보내 하룻밤 사이 앗수르 군사 18만 5000명을 멸하셨다. 산헤립은 예루살렘을 공격하지 못하고 수도 니느웨로 돌아갔다.[40]
남 유다 말기
바로 느고
바로 느고는 제26왕조 2대 파라오 네코 2세(Necho II, 재위: B.C. 609-B.C. 594)다. 앗수르의 수도 니느웨가 무너지고 3년 후 기원전 609년경 바로에 즉위했다. 바로 느고는 바벨론(신바빌로니아)의 나보폴라사르왕과 왕세자 느부갓네살의 세력이 커지기 전에 유프라테스강 지역의 패권을 장악해야 한다는 생각으로 즉위 직후, 블레셋 성읍인 가사와 아스글론을 정복해 팔레스타인 지역을 점령했다.[41]
애굽 왕 느고가 유브라데강 가의 갈그미스를 치러 올라온 고로 요시야가 나가서 방비하였더니 느고가 요시야에게 사자를 보내어 가로되 유다 왕이여 ... 내가 오늘날 그대를 치려는 것이 아니요 나로 더불어 싸우는 족속을 치려는 것이라 ... 하나 요시야가 몸을 돌이켜 떠나기를 싫어하고 ... 므깃도 골짜기에 이르러 싸울 때에 ... 저가 죽으니 그 열조의 묘실에 장사하니라
블레셋과의 전투 후, 느고는 앗수르의 주요 도시였던 하란을 점령하기 위해 북진하고 있었다. 이때, 남 유다 요시야왕이 므깃도에서 애굽 군대의 진군을 막았으나 전사했다. 므깃도 전투에서 승리한 느고는 요시야의 뒤를 이어 즉위한 여호아하스를 리블라(오늘날 레바논 국경 근처의 시리아의 마을 리블레)에 가두고 벌금을 내게 했으며 여호야김을 유다 왕으로 임명했다. 다시 진군한 느고는 앗수르의 패잔병들과 함께 하란을 탈환하려고 했으나 실패하고 유프라테스강 중류의 갈그미스에 군대를 주둔시켰다. 느고는 이전에 앗수르 제국이 지배하던 유프라테스강 서쪽 지역에 대한 지배권을 행사하며 남 유다의 여호야김으로부터 조공을 받았다.[42]
여호야김 제사년에 유브라데 하숫가 갈그미스에서 바벨론 왕 느부갓네살에게 패한 애굽 왕 바로느고의 군대에 대한 말씀이라 ... 바벨론 왕 느부갓네살이 와서 애굽 땅을 칠 일에 대하여 ... 바로와 및 그를 의지하는 자들을 벌할 것이라 내가 그들의 생명을 찾는 자의 손 곧 바벨론 왕 느부갓네살의 손과 그 신하들의 손에 붙이리라 그럴지라도 그 후에는 그 땅이 여전히 사람 살 곳이 되리라
느부갓네살이 이끄는 바벨론 군대와 느고의 애굽 군대는 기원전 605년경 갈그미스 전투를 벌였다. 느고는 전투에서 패배한 후 하맛에서 다시 느부갓네살과 싸웠지만 패배해 팔레스타인 일대의 패권을 빼앗겼다.[43]
바로 호브라
바로 호브라는 제26왕조 4대 파라오 와히브레(Wahibre, Apries, 재위: B.C. 589-B.C. 570)다. 호브라 이전부터 애굽은 남 유다를 포함한 팔레스타인 지역의 국가들이 바벨론에 반란을 일으키도록 부추기고 지원했다.[44] 애굽의 지원을 기대한 남 유다 왕 시드기야는 바벨론에 반기를 들고 애굽에 지원군을 요청했다.[45][46]
바로의 군대가 애굽에서 나오매 예루살렘을 에워쌌던 갈대아인이 그 소문을 듣고 예루살렘에서 떠났더라 여호와의 말씀이 선지자 예레미야에게 임하여 이르시되 ... 유다 왕에게 이르라 너희를 도우려고 나왔던 바로의 군대는 자기 땅 애굽으로 돌아가겠고 갈대아인이 다시 와서 이 성을 쳐서 취하여 불사르리라
당시 애굽에서는 호브라가 바로에 즉위했다. 바로 호브라는 바벨론이 예루살렘을 포위하자 군대를 보냈고, 이에 바벨론은 일시적으로 포위를 풀었다. 그러나 예레미야의 예언대로 바벨론 군대는 애굽군이 돌아가자 다시 예루살렘을 공격해 기원전 586년경 함락시켰다.[47] 바로 호브라는 멸망한 남 유다 피난민들을 애굽으로 받아들였다. 이때 요하난 일행이 애굽으로 가지 말라고 하신 하나님의 말씀[48]을 거부하고 예레미야 선지자를 포함해 유다 땅에 남으려던 유대 민족까지 애굽의 다바네스로 데리고 갔다.[49]
보라 내가 유다 왕 시드기야를 그 원수 곧 그 생명을 찾는 바벨론 왕 느부갓네살의 손에 붙인 것같이 애굽 왕 바로 호브라를 그 원수들 곧 그 생명을 찾는 자들의 손에 붙이리라 나 여호와가 이같이 말하였느니라 하시니라
성경에는 남 유다 왕 시드기야가 바벨론의 느부갓네살에 멸망했듯, 바로 호브라의 생명을 그 원수들에게 넘기실 것이라는 예언이 있다. 호브라는 리비아를 지원하기 위해 전쟁에 나갔다가 패배했는데, 동맹국을 돕는 전쟁에서 연이어 패배하자 애굽 군대는 아마시스 장군을 중심으로 반란을 일으켰다. 내전에서 패한 호브라는 외국으로 망명했다가 바벨론의 도움으로 다시 귀국했으나 아마시스의 군대와 싸우다가 기원전 570년경 전사했다.[50]
같이 보기
참조
- Ian Shaw, The Oxford History of Ancient Egypt, Oxford University Press, 2003
- Emil G. Hirsch et al., “Pharaoh,” Jewish Encyclopedia
각주
- ↑ 창세기 12:15, 출애굽기 1:11
- ↑ 창세기 41:46, 신명기 7:8
- ↑ 열왕기하 23:29
- ↑ 고대 이집트어(이집트 상형문자)에서는 모음을 표기하지 않기 때문에, pr-'o를 pero(퍼로, 페르오) 또는 per-a-a, Per’a(페르아)로 읽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 ↑ "פַּרְעֹה",《네이버 고대 히브리어사전》
- ↑ "Φαραώ", 《네이버 고대 그리스어사전》
- ↑ 7.0 7.1 이성호, “바로”, 《성경대사전》, 성서연구원, 2000, 604쪽
- ↑ 이집트의 최초의 지도자이자 신왕(神王)인 오시리스의 아들. 지상의 신, 질서를 회복하는 신이라고 한다.
- ↑ “Pharaoh,” World History Encyclopedia
- ↑ "Tiberius," pharaoh.se
- ↑ "Horus," World History Encyclopedia
- ↑ 제2왕조 2대 파라오 라네브(Raneb)
- ↑ 김성, 〈태양의 아들, '사-라(S3-R`)': 이집트 파라오 신격화의 기원〉, 《서양고대사연구》 제18권, 한국서양고대역사문화학회, 2006, 70쪽
- ↑ Howard F. Burton, "The Worship of the Roman," The Biblical World, Vol. 40(2), 1912, pp.80-81, "The impulse that led to the deification of the Roman emperors came from the East. The Pharaohs ... were worshiped as divinities both while living and when dead. When Rome conquered the East, the same divine honors were transferred to the Roman proconsuls."
- ↑ 최혜영, 〈고대 그리스, 로마의 영웅 숭배와 지배자 숭배; 로마 황제 숭배와 기독교〉, 《서양고대사연구》 제19권, 한국서양고대역사문화학회, 2006, 90쪽
- ↑ 열왕기상 6장 12절에 따르면, 기원전 11세기에 이뤄진 솔로몬의 성전 완공은 출애굽으로부터 480년이 지난 이후다. 따라서 출애굽 시기는 기원전 15세기로 추정할 수 있다. 이 문서에서는 출애굽 시기를 기원전 15세기를 볼 때를 기준으로 한다.
- ↑ 출애굽기 12장 40절에 따르면, 야곱의 권속이 애굽 땅 고센으로 이주했을 때부터 약 400여 년간 애굽에 거주했고 노예 생활을 했다고 되어 있다. 따라서 야곱 일가의 애굽 이주를 기원전 19세기경으로 볼 수 있다.
- ↑ 창세기 12:10-20.
그 땅에 기근이 있으므로 아브람이 애굽에 우거하려 하여 그리로 내려갔으니 ... 그 아내 사래더러 말하되 ... 원컨대 그대는 나의 누이라 하라 ... 아브람이 애굽에 이르렀을 때에 ... 바로의 대신들도 그를 보고 바로 앞에 칭찬하므로 그 여인을 바로의 궁으로 취하여 들인지라 ... 이에 바로가 그를 인하여 아브람을 후대하므로 ... 여호와께서 아브람의 아내 사래의 연고로 바로와 그 집에 큰 재앙을 내리신지라 바로가 아브람을 불러서 이르되 ... 네가 어찌 그를 누이라 하여 나로 그를 취하여 아내를 삼게 하였느냐 네 아내가 여기 있으니 이제 데려가라 하고 바로가 사람들에게 그의 일을 명하매 그들이 그 아내와 그 모든 소유를 보내었더라
- ↑ 창세기 41장
- ↑ 창세기 46:26-27.
야곱과 함께 애굽에 이른 자는 야곱의 자부 외에 육십육 명이니 이는 다 야곱의 몸에서 나온 자며 애굽에서 요셉에게 낳은 아들이 두 명이니 야곱의 집 사람으로 애굽에 이른 자의 도합이 칠십 명이었더라
- ↑ 출애굽기 1:6-11.
요셉과 그의 모든 형제와 그 시대 사람은 다 죽었고 이스라엘 자손은 생육이 중다하고 번식하고 창성하고 심히 강대하여 온 땅에 가득하게 되었더라 요셉을 알지 못하는 새 왕이 일어나서 애굽을 다스리더니 그가 그 신민에게 이르되 이 백성 이스라엘 자손이 우리보다 많고 강하도다 ... 두렵건대 그들이 더 많게 되면 전쟁이 일어날 때에 우리 대적과 합하여 우리와 싸우고 이 땅에서 갈까 하노라 하고 ... 그들로 바로를 위하여 국고성 비돔과 라암셋을 건축하게 하니라
- ↑ 사도행전 7:17-18.
하나님이 아브라함에게 약속하신 때가 가까우매 이스라엘 백성이 애굽에서 번성하여 많아졌더니 요셉을 알지 못하는 새 임금이 애굽 왕위에 오르매
- ↑ 출애굽기 1:12-22.
그러나 학대를 받을수록 더욱 번식하고 창성하니 애굽 사람이 이스라엘 자손을 인하여 근심하여 ... 바로가 그 모든 신민에게 명하여 가로되 남자가 나거든 너희는 그를 하수에 던지고 여자여든 살리라 하였더라
- ↑ 24.0 24.1 출애굽기 9:16.
내[여호와]가 너[바로]를 세웠음은 나의 능력을 네게 보이고 내 이름이 온 천하에 전파되게 하려 하였음이니라
- ↑ 출애굽기 2장
- ↑ 출애굽기 14장
- ↑ 로마서 9:17.
성경이 바로에게 이르시되 내가 이 일을 위하여 너를 세웠으니 곧 너로 말미암아 내 능력을 보이고 내 이름이 온 땅에 전파되게 하려 함이로라 하셨으니
- ↑ 역대상 4:18.
이는 메렛의 취한 바로의 딸 비디아의 아들들이며 또 그 아내 여후디야는 그돌의 조상 예렛과 소고의 조상 헤벨과 사노아의 조상 여구디엘을 낳았으며
- ↑ 이성호, “비디아”, 《성경대사전》, 성서연구원, 2000, 759쪽
- ↑ “Pharaoh,” Jewish Encyclopedia
- ↑ 열왕기상 3:1, 열왕기상 7:8, 열왕기상 9:16-24, 열왕기상 11:1-20
- ↑ 열왕기상 11:30-33.
아히야가 그 입은 새 옷을 잡아 열두 조각에 찢고 여로보암에게 이르되 너는 열 조각을 취하라 이스라엘 하나님 여호와의 말씀이 내가 이 나라를 솔로몬의 손에서 찢어 빼앗아 열 지파를 네게 주고 오직 내 종 다윗을 위하고 이스라엘 모든 지파 중에서 뺀 성 예루살렘을 위하여 한 지파를 솔로몬에게 주리니 이는 저희가 나를 버리고 시돈 사람의 여신 아스다롯과 ... 밀곰을 숭배하며 그 아비 다윗의 행함 같지 아니하여 ... 나의 법도와 나의 율례를 행치 아니함이니라
- ↑ 제21왕조, 제22왕조, 제23왕조, 제24왕조가 동시다발적으로 등장하며 이집트가 여러 소왕국과 도시들로 쪼개어 분열되었던 시기(B.C. 1069-B.C. 664년경)를 가리킨다.
- ↑ William F. Albright, “Further Synchronisms between Egypt and Asia in the Period 935-685 BC,” Bulletin of the American Schools of Oriental Research, Vol. 44(1), University of Chicago, 1956, pp.23-27
- ↑ Mavin Alan Sweeney, I & II Kings: A Commentary, Westminster John Knox Press, 2007, p.393
- ↑ 일부 학자들은 랍사게가 장수의 이름이 아니라, 고대 메소포타미아에서 왕실의 술을 담당하던 수석 책임자의 직위 혹은 칭호로 보기도 한다.
- ↑ 열왕기하 18:21.
이제 네가 저 상한 갈대 지팡이 애굽을 의뢰하도다 사람이 그것을 의지하면 그 손에 찔려 들어갈지라 애굽 왕 바로는 무릇 의뢰하는 자에게 이와 같으니라
- ↑ “바로”, 《새성경사전》, 기독교문서선교회, 2001, 570쪽
- ↑ 이성호, “디르하가”, 《성경대사전》, 성서연구원, 2000, 406쪽
- ↑ 열왕기하 19:35-36.
이 밤에 여호와의 사자가 나와서 앗수르 진에서 군사 십팔만 오천을 친지라 아침에 일찍이 일어나 보니 다 송장이 되었더라 앗수르 왕 산헤립이 떠나 돌아가서 니느웨에 거하더니
- ↑ 예레미야 47:1-5.
바로가 가사를 치기 전에 블레셋 사람에 대하여 선지자 예레미야에게 임한 여호와의 말씀이라 ... 가사가 삭발되었고 아스글론과 그들에게 남아 있는 평지가 멸망되었나니 네가 네 몸 베기를 어느 때까지 하겠느냐
- ↑ 열왕기하 23:33-35.
바로느고가 저를 하맛 땅 립나에 가두어 예루살렘에서 왕이 되지 못하게 하고 또 그 나라로 은 일백 달란트와 금 한 달란트를 벌금으로 내게 하고 바로느고가 요시야의 아들 엘리아김으로 그 아비 요시야를 대신하여 왕을 삼고 그 이름을 고쳐 여호야김이라 하고 여호아하스는 애굽으로 잡아갔더니 저가 거기서 죽으니라 여호야김이 은과 금을 바로에게 주니라 저가 바로느고의 명령대로 그에게 그 돈을 주기 위하여 나라에 부과하되 국민 각 사람의 힘대로 액수를 정하고 은금을 늑봉하였더라
- ↑ 열왕기하 24:7.
애굽 왕이 다시는 그 나라에서 나오지 못하였으니 이는 바벨론 왕이 애굽 하수에서부터 유브라데 하수까지 애굽 왕에게 속한 땅을 다 취하였음이더라
- ↑ 유윤종, 〈느부갓네살 2세: 역사와 전승〉, 《서양고대사연구》 제23권, 한국서양고대역사문화학회, 2008, 46-47쪽
- ↑ 열왕기하 24:20.
여호와께서 예루살렘과 유다를 진노하심이 저희를 그 앞에서 쫓아내실 때까지 이르렀더라 시드기야가 바벨론 왕을 배반하니라
- ↑ 에스겔 17:15-17.
그가 사자를 애굽에 보내어 말과 군대를 구함으로 바벨론 왕을 배반하였으니 형통하겠느냐 이런 일을 행한 자가 피하겠느냐 언약을 배반하고야 피하겠느냐 나 주 여호와가 말하노라 내가 나의 삶을 두고 맹세하노니 바벨론 왕이 그를 왕으로 세웠거늘 그가 맹세를 업신여겨 언약을 배반하였은즉 그 왕의 거하는 곳 바벨론 중에서 왕과 함께 있다가 죽을 것이라 대적이 토성을 쌓으며 운제를 세우고 많은 사람을 멸절하려 할 때에 바로가 그 큰 군대와 많은 무리로도 그 전쟁에 그를 도와주지 못하리라
- ↑ 예레미야 39:1-2.
유다 왕 시드기야의 구 년 시월에 바벨론 왕 느부갓네살과 그 모든 군대가 와서 예루살렘을 에워싸고 치더니 시드기야의 제 십일 년 사월 구일에 성이 함락되니라 예루살렘이 함락되매
- ↑ 예레미야 42:7-22.
십일 후에 여호와의 말씀이 예레미야에게 임하니 ... 너희는 그 두려워하는 바벨론 왕을 두려워 말라 내가 너희와 함께 하여 너희를 구원하며 그의 손에서 너희를 건지리니 두려워 말라 ... 그러나 만일 너희가 ... 애굽 땅으로 결단코 들어가 거하리라 하면 잘못되리라 ... 무릇 애굽으로 들어가서 거기 우거하기로 고집하는 모든 사람은 이같이 되리니 곧 칼과 기근과 염병에 죽을 것인즉 내가 그들에게 내리는 재앙을 벗어나서 남을 자 없으리라 ... 유다의 남은 자들아 여호와께서 너희 일로 하신 말씀에 너희는 애굽으로 가지 말라 하셨고 나도 오늘날 너희에게 경계한 것을 너희는 분명히 알라 ... 내가 오늘날 너희에게 고하였어도 너희가 그 목소리를 도무지 순종치 아니하였은즉 너희가 가서 우거하려 하는 곳에서 칼과 기근과 염병에 죽을줄 분명히 알지니라
- ↑ 예레미야 43:4-11.
이에 가레아의 아들 요하난과 모든 군대장관과 모든 백성이 유다 땅에 거하라 하시는 여호와의 목소리를 청종치 아니하고 ... 선지자 예레미야와 네리야의 아들 바룩을 영솔하고 애굽 땅에 들어가 다바네스에 이르렀으니 그들이 여호와의 목소리를 청종치 아니함이 이러하였더라 다바네스에서 여호와의 말씀이 예레미야에게 임하여 가라사대 ... 내가 내 종 바벨론 왕 느부갓네살을 불러오리니 ... 그가 와서 애굽 땅을 치고 죽일 자는 죽이고 사로잡을 자는 사로잡고 칼로 칠 자는 칼로 칠 것이라
- ↑ 가스펠서브, "호브라", 《라이프성경사전》, 생명의말씀사, 2006, "애굽 제26왕조 4대 왕(B.C. 588-569년). 바로 느고의 계승자. ... 후에 호브라는 B.C. 569년에 리비아 반란 진압에 실패하였고, 이어 국내에서도 반란이 일어나 부하 장군 아마시스에게 살해당하고 말았다."